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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말해주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도련님의 저택에서 예지력이 있다는 개뻥을 까며 지내온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언제부턴가 날씨가 엄청 쌀쌀맞아졌구나.' 과거에 오고 나서부터 잊혀진 날짜 감각에 위기감을 느끼며 달력을 팔락팔락 넘기며 찾은 오늘의 날짜는 12월 18일. 그러고 보니 곧 크리스마스네, 무의식중에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살던 현세. 즉, 이곳에서는 먼 미래인 그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념일. 이 세상 어디에도 크리스마스만큼 로맨틱한 기념일은 없으리라고, 그때의 난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도! 본디 크리스마스란, 연인들이 겨울 쌀쌀한 날씨에 서로의 손을 잡고 한 해도 마무리했다 생각하며 데이트하던 날이 아니었던가. '이 시대에도 그런 식으로 데이트를 했을진 모르겠지만...' 과거로 돌아와서 많은 잡학 지식을 얻었지만 그 중..

카테고리 없음 2025.09.20

[유예] 다정하고 악한

빌어먹을 어별교 놈들! 감히 사이온지 선생의 피와 살 같은 돈을……. 놈들은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놈들을 꼭 찾아서 처단하겠습니다. 사이온지 선생, 너무 심상하지 마소. 괜찮을 거요. 제각각의 목소리가 ‘사이온지’를 위로했다. 선우진은 다치지 않았다. 그저 팔에 깁스를 둘렀을 뿐이다. 하지만 팔에 깁스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군인과 경찰들은 사이온지를 피해자라고 단정 짓고 그를 서둘러 모시다시피 했다. 그 결과 그는 피해자로 조사를 받게 되었고, 통상적인 조사가 아니라 단순한 위로의 말을 건네어 듣는 일을 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선생.” “어별교 놈들이 나를 밀어 넘어뜨린 뒤 그대로 도망갔소. 그 뒤로는…… 글쎄, 어디로 갔는지.” 쯧. 그가 미간을 좁히면서 사이온지의 역할을 충실히 ..

카테고리 없음 2025.09.20

[유예] 할로윈 시크릿

겨울이 문 앞까지 다가와 있었기에 예달은 옷을 더 여몄다. 두꺼운 옷을 찾기에는 너무 이르고, 얇은 춘추복으로 밤거리를 거닐기에는 날이 찬 탓이었다. 찻잎을 미리 사두었어야 했는데. 예달은 낮에 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신발을 마저 고쳐 신었다. 가게 문이 닫히기 전에 가려면 지금 나서야 했다. 대로로 나가자마자 건너편 골목을 끼고 오른쪽으로, 그리고 대로가 나올 때까지 직진. 예달은 머리로 길을 그리며 발을 재촉했다. 막 대로를 빠져나와 골목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을까. 등골을 훑는 소름에 예달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봤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 밝게 뜬 달만 환하게 길거리를 비추는 가운데 스쳐 지나가야 했을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예달은 고개를 돌려 골목의 사이를 바라봤다.부둥켜안은 두 사람..

카테고리 없음 2025.09.20

[유예] 사람에서 사랑을 구출하는 법

성가신 세상은 포커 카드처럼 간단히 넘겨버리고 작은 분홍에 대해서 생각하자 물렁한 납작 복숭아와 크림치즈필링이 올라간 타르트 색색의 과자가 꽂힌 여름에 난 제철 무화과 파르페 겨울에 난 생딸기 같은 당신의 새빨간 혀가 훑은 아릿하게 달기만 한 디저트 금방 녹아버려도 메인 디쉬가 아니더라도 태어난 역할을 다하고 있어서 제법 괜찮지? 저 먼 곳을 떠돌래 은밀히 불 켜진 경성의 다방과 딸기나무의 열매처럼 빽빽이 늘어선 서울의 카페를 맴돈다 같은 장소에 위치한 다른 곳에 똑같은 발자국을 남길 수 있어 길이 막힐 때면 없어져버리는 조그마한 것들과 사랑에 빠진다 다이아몬드나 금화 같은 영원해서 비싼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튤립 아래 당신을 심고 꽃이 피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세상에..

카테고리 없음 2025.09.20

여우 도련님

좋은 아침, 상쾌한 아침! 예달은 유난히 좋은 아침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늦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얼른 옷을 갈아입고 후다닥 선우진을 찾았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게 될까 궁금함을 품으면서 저택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만나는 건 여전히 정체를 잘 모를 험상 궂은 남자들-선우진이 고용한 자들-뿐이었고 선우진은 없었다. 마지막 보루로 도련님의 침실로 향하고 있으니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도련님이 오늘은 나를 깨우지 않았을까? 예달이 처져 있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뚜벅뚜벅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 ‘도련님, 들어갈게요’ 하며 안으로 몸을 들였다. 그러자 선우진은 보이지 않았고 갈색 털을 가진 아기 여우가 침대에 있었다. 다 큰 여우에 비해서 너무..

카테고리 없음 2025.09.20

[유예] 메이드가 남자면 역시 곤란한가요?

예달은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마지막 갈무리로 리본을 묶는 것이 아니라 뉴스 보이 캡을 썼다. 치마로 된 메이드복이 아니라 하얀색 셔츠와 체크 무늬 바지, 그리고 멜빵을 어깨에 걸쳤다. 키에 맞도록 제대로 조이고 적당히 어깨를 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예달은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남자가 된 것은 겨우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슬픔은 잠시였다. 시대적 상황 때문에 여자라면 제약이 많지만 도련님과 같은 남자가 된다면 할 수 있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사이온지 도련님을 따라서 도박장에 갈 수 있었다. 도박장이라고 하니 무서운 마음이 많이 들렸지만 도련님을 지키기 위해서(?) 라면 자신이 조금 무섭더라도 무조건 불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함께 동행하겠다고 했다. 굳건한 예달의 얼굴을 본 ..

카테고리 없음 2025.09.20

[유예] 집사와 아가씨

방년 스물 셋, 뭇 사람들이 보았을 때 혼기에 적합한 나이였다. 예달의 부모님 또한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이제는 제대로 아이를 꾸며서 맞선 자리에 내보내기로 했고…… 그 결과 예달은 집사로부터 예절 교육을 다시 한 번 받게 되었다. 귀족 집안의 아가씨 신분이었으니 늘 교육을 받고 있었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교육과 동떨어진 웃음 소리나 걸음걸이였기에 정말로 제대로 된 엄격한 방식이 필요했다. 맞선을 나가게 되는 것은 가문을 대표하는 자리이기도 하니 더더욱. 예달은 사실 긴장도 되고 맞선도 예절 교육도 꼭 해야만 하는 걸까 고민했지만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집사인 사이온지는 예달의 부모님이 부재중인 상황에 교육을 맡게 되어 막중한 책임이 따랐다. 그렇게 정식으로 명령을 받은 날 아..

카테고리 없음 2025.09.20

[유예] XX은 카멜리아에서

예달 양, 잘 잤나요? 간밤에 비가 좀 왔던데 방에 비가 들이치지는 않았고요? 점심때가 지나면 카멜리아로 와주면 좋겠어요. 대략 한 시에서 두 시 정도면 될 것 같네요. 사거리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그 카페예요. 우리 저번에 같이 다녀온 적 있죠? 예달 양이 쇼트 케이크를 세 개나 먹었던 거기요. 혹시 위치를 잊었을까 봐 약도라도 그려 놓으려고 했는데, 손재주가 좋질 않아서 이렇게 말로만 설명을 하게 되었어요. 이해해 줘요. 서재 책장 서랍장 가장 아래 칸에 보면 포장된 작은 상자가 있을 거예요. 파란색 리본이 둘린 거. 그거만 갖다 주면 되겠어요. 아 참, 바로 위 서랍을 열어 보면 흰색 봉투도 있을 거예요. 거기서 십 전 정도 챙겨서 같이 나와 주면 좋겠어요. 돈은 나한테 전달해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카테고리 없음 2025.09.20

[유예] 술 권하는 사회

예달의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사내가 들고 있는 칼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저한테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거 풀어주세요! 네? 제발요…….” 울먹거리면서 어떻게든 빌고 또 빌어 보았는데도 사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끄러워! 하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예달을 협박하기만 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이 칼이 어디를 향할지 모른다면서 마구 화를 내고 있었는데 예달은 그런 게 하나하나 다 무섭고 또 두려워서 히끅, 딸꾹질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중에도 남자의 험악한 인상이 너무 무서워서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억지로 우는 소리를 참아 보아도 계속 새어나오는 게, 예달은 꼭 자신이 고장 난 것만 같았다. 남자들이 수군수군거리..

카테고리 없음 2025.09.20

[유예] 그와 그녀의 사생활

예달의 홍차 우려내기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티 백을 잘못 뜯어서 티 백에 구멍을 낸 적도 있는 반면 지금은 구멍은 고사하고 빼낼 때까지 시간을 보지 않아도 언제쯤 빼내면 가장 훌륭한 맛을 내는지 가늠이 가능할 정도로 능력이 탁월해졌다. 예달은 오늘도 선우진에게 가져다 줄 홍차를 타고 나서 뿌듯해했다. 아주 많이 탄 만큼 실력이 느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런 소소한 게 너무 기뻤다. 웃음꽃을 가득 피우면서 홀로 들 뜬 발걸음을 재촉해 다과를 함께 내놓으려 그의 침실로 향했다. 도도도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중에도 혹시나 발이 꼬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열심히 만든 홍차를 대접하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고 그렇게 들어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건 처음 보는 ..

카테고리 없음 2025.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