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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말해주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푸딩챤 2025. 9. 20. 09:23

 
도련님의 저택에서 예지력이 있다는 개뻥을 까며 지내온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언제부턴가 날씨가 엄청 쌀쌀맞아졌구나.' 
과거에 오고 나서부터 잊혀진 날짜 감각에 위기감을 느끼며 달력을 팔락팔락 넘기며 찾은 오늘의 날짜는 12월 18일. 그러고 보니 곧 크리스마스네, 무의식중에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살던 현세. 즉, 이곳에서는 먼 미래인 그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념일. 이 세상 어디에도 크리스마스만큼 로맨틱한 기념일은 없으리라고, 그때의 난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도! 본디 크리스마스란, 연인들이 겨울 쌀쌀한 날씨에 서로의 손을 잡고 한 해도 마무리했다 생각하며 데이트하던 날이 아니었던가. 
'이 시대에도 그런 식으로 데이트를 했을진 모르겠지만...' 
과거로 돌아와서 많은 잡학 지식을 얻었지만 그 중 가장 놀라운 건 이 시대에도 크리스마스를 호들갑 떨며 챙겼다는 사실일 것이다. 하긴, 옛날 사람들도 로맨틱한걸 좋아했겠지. 당장 현세 사극 드라마만 봐도 러브가 무엇이오? 를 외치며 꽁냥거리는 드라마가 많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장터에는 기념일이라는 수단으로 한 몫 챙기겠다는 상인들로 북적북적, 거리에는 귀부인들이 요란법석하게 크리스마스를 챙기고 있다. 듣자 하니 역시나, 크리스마스라는 기념일이 생긴 것이 그리 오랜 역사가 아니라는 듯하다. 
사실은,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내 머릿속엔 한 인물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이온지 도련님', 내가 이 시대에 떨어졌을 때 제일 처음 본 사람이자... 내가 일하고 있는 저택의 주인님.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난 도련님을 좋아한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훤칠한 외모에 큰 키 하며, 거기다 다정한 성격까지. 고백 같은 거라거나 해서 도련님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행복한 기념일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사소한 욕심은 부릴 수 있는 것 아닐까? 화류계를 꿰뚫고 있는 사이온지 도련님이라면, 분명 곧 어떤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아실 텐데. 
"하아..." 
도련님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만이 앞서 무얼 어떻게 준비할지 하나도 잡히지 않아. 생각해보자, 김예달. 현세에서는 기념일을 어떤 식으로 보냈지...? 맞아, 깜짝파티! 가장 무난하다면 무난하고, 쉽다면 쉬운 방법 아닌가! 분명 오늘 날짜가 18일이었으니, 25일 크리스마스까지는...
"일주일 남았잖아?!" 
으아, 이러고 있을 시간 따위 없어! 난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무작정 발길이 닿는 대로 온 곳은 시장이었다. 분명 저번에 크리스마스 관련 상품들을 많이 봤으니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과 다르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없잖아...!!!' 
맞다, 지금은 1930년대, 크리스마스가 막 들어온 시기... 사람들이 엄청나게 들떠있을 거란 것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뭘 사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없는 물건을 구하러 다닌다는 최악의 선택지 앞에서, 난 팔자에 없는 계획을 짜보기로 결심했다. 
자, 크리스마스 하면 뭐가 있을까, 당연히 산타와 선물이려나? 외국에서는 칠면조 구이같이 생긴 것도 먹는다는 것 같던데. 맛있겠다... 
일단 제쳐두고 크게 추리자면 도련님께 드릴 선물과 코스튬, 그리고 예지력이라는 거짓말 하나로 들어온 난 절대 요리 같은 건 하지 못하기에 요리도... 살짝 추가해야겠다. 흐아, 이럴 줄 알았더라면 평소에 요리 좀 배워둘걸! 
아무도 들어주지 못할 절규를 하며 쓱쓱 써 내려갔다. 역시, 큰 가지가 있으니 술술 쓰이는구만! 이 정도까지 발전했는데, ....도련님이 칭찬해주셨으면 좋겠다. 괜히 나 혼자 설레발을 치며 시장으로 갈 채비를 끝냈다. 
 
장터 구경은 예나 지금이나 재밌다. 현세 시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옛날 물건 특유의 분위기와, 이제 막 수입된 크리스마스의 어색하면서도 행복한 분위기가 합쳐져 진국을 이룬다. 자연스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자, 음식은 이브에 산다고 가정하고... 오늘은 코스튬이랑 선물, 사보자! 
분위기와 감성에 취해 터벅터벅 걸어다니자니, 저 멀리 상점의 진열대에서 무언가 반짝거렸다. 홀린 듯 이끌려 간 그곳에는... 넥타이핀이 있었다. 심플하면서도 적당히 화려한 디자인이 얼핏 봐도 사이온지 도련님을 연상시켰다. 무심코 넥타이핀을 한 도련님을 상상해보자니, 
'... 안 살 수가 없잖아! 넥타이핀이 날 부르는걸!'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가격표를 확인한 순간, 약간 절망했다. 
'뭐지, 이 애매한 가격... 저렴하다고도 비싸다고도 못하겠네.'
고민을 하고 있는 고객을 알아차리는 것은 직원에게 당연한 서비스 제공의 거리이자, 호객 행위를 할 절호의 기회인 법이다. 
"어머, 연인한테 선물하실건가봐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네, 네??" 
얼굴에 화악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바보 같은 얼굴일 거야. 이런 나를 보고도 직원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을 잇는다. 
"분명 잘 어울리실 거예요. 지금 이 근방에서도 예쁘다고 난리가 난 상품이거든요~" 
그 분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라는 직원의 말을 끝으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 코스튬 뭐, 그까이꺼 한 번 만들어보고 말지! 이래 봬도 현세 한국의 가정 수업 수강생이었다고!
 
  참혹하다... 싸늘하다.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그렇게 넥타이핀에 대부분 저축한 돈을 쓰고 음식 살 돈만 겨우겨우 남겨둔 지금, 집에는 빨간색 원단과 값싼 인모 조금을 사서 왔다. 
분명 난 산타 모자를 만들려고 했는데? 이건? 뭐지?? 도대체 내 머리둘레까지 대강 쟀음에도 머리통 자체가 들어갈 만한 어마어마한 크기는 어디서 나온 거지? 너무 당황스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때, 무언가 번뜩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아예 망토로 만들면 되잖아! 하, 김예달...! 넌 생각보다 쓸만한 녀석이야! 환호성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낑낑대며 밑에 긴 원단을 덧대보자니,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6일간의 고생과 기대가 저물어갔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저녁이다. 오늘만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르겠다. 사이온지 도련님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어, 보통 도련님이 퇴근하기 3시간 전에 시장에 가서 여러 가지 요리를 사 왔다. 도련님이 맛있어 할 만한 걸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맛있어 보인다고 느낄 사람은 도련님 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나도 모르게 도련님이 오시기 전에 다 먹어 치워버릴까 봐 걱정할 정도였다... 
그렇게 촛불까지 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득 시간이 꽤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련님이 오실 시간은 훨씬 지났는데, 사업이 많이 바쁘신걸까... 오늘 안에 들어오시긴 하겠지? 여자를 만나고 계신걸까...? 아니야, 내가 감히 무슨 사이라고 기분 나빠해?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이 지나가며, 눈앞에 일렁이는 촛불을 보고 있자니 점점 몽롱해져만 갔다. 결국 그렇게 스르륵, 내 고개는 숙여졌다. 자면 안 되는데, 도련님... 기다려야 하는데. 언제쯤 오실까. 그게 잠들기 전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선우진이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저택은 어두컴컴했다. 보통 어느 때든 자신이 왔다 하면 후다닥 달려와서 반겨주는 예달의 분홍색 머리칼은 오늘따라 보이지도 않았으며, 수상할 정도로 고요한 집안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경계를 하며 들어가 불을 켜니, 이제야 사건의 진상이 보인다. 이미 다 차갑게 식은 음식과 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복장까지, 분명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엉뚱한 짓을 한답시고 늦게까지 저를 기다렸으리라.
선우진은 생각했다. 김예달이란 여자는 정말 막연하고도, 순진하다고. 수상한 게 천지인 자신에게 온 마음을 쏟아붓는다.
보답받지도 못할 걸 알면서.
선우진은 무심결에 시계를 쳐다봤다. 3시 18분, 이미 크리스마스는 한참 지난 시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방금 전까지 여자들과 희희낙락하는 척을 하다 온 선우진이, 자신의 옷에 온갖 여자 향수 냄새가 배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선우진은 물끄러미 식탁과, 엎어져 자고 있는 예담을 번갈아 쳐다봤다. 서투름의 극치를 보여주는 상차림 솜씨지만, 그럼에도 정성과 따뜻함이 묻어나는 배치. 우스꽝스럽다 생각한 복장은 자세히 보니 김예달의 핸드메이드로 추정된다. 그렇게 손재주도 없는 사람이. 저가 온건 아는지 모르는지, 새근새근 자고 있는 예달을 보던 선우진은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정말, 이 사람은 왜 이리도 저에게 애정을 쏟는 걸까. 
선우진-그녀에게 있어서 사이온지 도련님-은, 최대한 예달이 깨지 않게, 조심히 들어서 침대에 옮겼다. 그리 기다리던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곤히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자는 예달을 보며, 선우진이 예달에게 한 말은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