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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술 권하는 사회

푸딩챤 2025. 9. 20. 09:07

 

예달의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사내가 들고 있는 칼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저한테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거 풀어주세요! 네? 제발요…….” 

울먹거리면서 어떻게든 빌고 또 빌어 보았는데도 사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끄러워! 하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예달을 협박하기만 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이 칼이 어디를 향할지 모른다면서 마구 화를 내고 있었는데 예달은 그런 게 하나하나 다 무섭고 또 두려워서 히끅, 딸꾹질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중에도 남자의 험악한 인상이 너무 무서워서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억지로 우는 소리를 참아 보아도 계속 새어나오는 게, 예달은 꼭 자신이 고장 난 것만 같았다. 

 

남자들이 수군수군거리고 있더니 예달에게 다가왔다. 예달은 잔뜩 긴장해 이미 찢어져 있는 옷-선우진이 준 것이라 예달이 몹시 아꼈는데 그렇게 되어 버렸다-을 바라보면서 시무룩한 얼굴에 긴장감을 깃들였다. 

“어이. 너한테 예지력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다 돌아서 알고 있어. 웬 핑크 머리 여자가 미래를 안다는 거 같더라고? 그게 너지?” 

“아니에요, 저는 진짜로 아무것도 몰라요……! 내일 아침 식사에 뭐가 나올지도, 히약!” 

정말로 모르는 일임에도 일단 발뺌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사내가 잘 간 칼을 탁 보이면서 위협적으로 말했다. 

“다 알고 있다고, 어!” 

“잘못, 잘못, 흐윽,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만, 하지 말고!” 

남자가 예달의 뺨을 한 대, 두 대 후려 쳤다. 이윽고 칼을 들이밀면서 예달의 턱밑에 두고서는 말했다. 처연하게 처져 있는 눈꼬리를 보고도 그는 인정사정없이 굴었다. 그러자 뒤에 있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뚜벅뚜벅 다가와 고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들어도 귀족이 쓰는 일본어 같아서 예달은 더욱 긴장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저 귀족 남성이 소유하고 있는 저택의 지하실인 듯했다. 아니면 최악의 경우 외딴 곳일 수도 있었는데, 그건 제발 아니기를 바랐다. 

 

“집에 곧 어떤 괴한이 들어와서 중요한 서류를 훔쳐갈 거란 정보가 들어왔어. 그러니, 네가 좀 도와줘야 겠다.” 

“……그, 그런 거 잘 몰라요!” 

“그런 말은 안 통해. 언제 침입할지, 그 서류가 무엇인지 알아내. 그 능력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있었다. 분홍 머리 여자의 낌새가 가장 수상하다고.” 

날카로운 눈길을 띤 중후한 사내가 말하자 예달은 또 겁을 먹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이제는 아예 조용히 반항하려는 심산이라 여겼는지 남자 하나가 또 어이! 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예달이 있는 의자를 콱 걷어찼다. 그러자 뒤로 넘어갈 뻔했다. 예달은 허어엉,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덜컹거리는 의자를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데다가 뒤에서는 자신의 머리통을 한두 번씩 때리는 남자가 있어 너무 무서웠다. 정말로 오금이 저리고 차라리 기절했으면 싶을 정도였다. 

“저는, 흑, 정말 없어요. 그런 거 정말, 허어어엉……!” 

예달이 아주 서럽게 울어 젖히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몰라서 도련님의 접시를 깨먹는 메이드가 무얼 할 수 있겠냐고 심각하게 말하고 있기도 잠시, 예달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울음이 멎을 때까지도 그녀는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다. 계속 물을 맞고 뺨을 맞으면서도 정말로 아는 게 없다고 말하더니, 이제는 죄송하다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눈빛을 교환하던 그들은 이런 백치 같은, 하면서 모욕적인 언사를 늘어놓고서는 이윽고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정말 이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고. 

 

“어이, 어쩔 거야?” 

“젠장…… 이 여자는 사이온지를 모시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하게 하면 안 되는데.” 

사이온지와 엮이면 아주 귀찮아! 그는 씩씩거리면서 예달에게 삿대질을 했다. 예달은 그 두툼한 손길이 향하는 것만 해도 두려워서 또 벌벌 떨었다. 이미 엉망이 된 옷에다가 채찍을 몇 대 얻어 맞은 탓에 찢어진 옷과, 그 사이로 흐르고 있는 피가 예달의 몸을 적시고 있음에도 그들은 동정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공작 저하.” 

귀족을 향해 묵례를 해 보이면서 그리 묻자 남자는 자리에 앉아 있는 예달을 하찮고 우습다는 듯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피곤하고 귀찮은 눈치였다. 벌레 보듯 하는 시선에 예달이 겁을 먹었다. 

“……처리해라.” 

귀족 남자는 비정하게 그리 말하고서는 지팡이를 짚고 뚜벅뚜벅 나가 버렸다. 쓸모 없는 것. 하고 중얼거리는 데에는 인간적인 면모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예달은 처리하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잠시만요, 잠시만요, 하고 웅얼거렸다. 아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제, 잘, 잘못했어요. 제가 도련님께는 아무, 런 말씀도, 흐읏, 안 드릴게요.” 

히끅, 딸꾹질이 계속 올라와서 힘들었다. 태연하게 말하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밧줄을 풀어주는 사내의 팔뚝을 마구 붙잡자 남자 하나가 에이, 씨! 하고 소리를 지르며 팔을 탈탈 털었다. 안 그래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제 고용주의 심기가 불편해졌는데 예달까지 귀찮게 하니 짜증이 난 눈치였다. 

“잡아.” 

“예.” 

한둘 모여들더니 밧줄이 풀려 자리에서 일어선 예달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대로 묶어서 강에 던져 버릴 심산인 듯했다. 피가 흐르거나 살점이 바닥에 남으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포대에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불이야! 불이 났습니다, 놈이 침입한 듯합니다! 불이야!” 

불이야! 놈이 침입했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사내들은 옳다구나 싶어 허둥지둥 예달을 내팽개치고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예달은 어차피 졸개에 불과하고 정말로 잡아야 할 놈은 침입자였으니 당연한 우선 순위였다. 그러나 바깥의 문은 꽁꽁 잠그고 나가버려 예달은 쉬이 나갈 수 없을 듯 보였다. 

얼떨결에 풀려난 예달이 으아, 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도련님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자약하게 일단 빠져나가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예달은 그럴 담력이 없었다. 바깥에 누가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예달은 울먹거리면서 다시 차오르려는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도련님이 직접 준 것인데 이렇게 망가져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도련님에게 이야기하면 혹시나 도련님이 저 나쁜 놈들에게 보복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이 옷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예달은 급하게 울적해진 나머지 무력해졌다. 

 

그 때였다. 달그락, 벌컥! 세찬 소리와 함께 지하실의 문이 열렸다. 남자들이 잠그고 간 문이니 또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서 겁을 먹고 벌벌 떨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복면을 쓴 사내가 하나 드러났다. 키가 제법 컸다. 

“누구세요, 살, 살려주세요. 저는, 아, 아무것도 몰라요!” 

굳이 여기서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제 도련님처럼 키가 크고 약간 마른 남자였다. 아까 자신을 납치하고 괴롭힌 사람들 중에는 없었던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예달은 의자 뒤로 숨어 의자 등받이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집어 던지기라도 해야 할 게 보였다. 

“……아.” 

상대방은 당황한 듯 살짝 움찔 떨었다. 예달은 생면부지의 사내가 수상하게 등장한 게 더욱 신경이 쓰여서 아무런 감정도 읽지 못하고 그저 의자만 꼭 쥐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오, 오지 마세요. 저, 오, 오시면 이거 던……질 거예요, 제발요!” 

오지 말라고 위협하지 말라고 하면서 예달이 벌벌 떨었다. 그러고 있으니 사내는 조금 어안이 벙벙한 듯 뒷걸음질을 치더니 일단 문을 닫았다. 그는 예달이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게 침입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들켜서는 안 됐다. 원래 닫혀 있던 대로 톡 닫고 나자 예달은 더욱 겁을 먹어서는 흐윽, 하고 울며 살려 달라고 빌었다. 굳건히 잡고 있는 의자 등받이에 땀이 눌러 붙었다. 

 

한편 사내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화재를 일으켜 주의를 집중시킨 다음 자신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렸다. 그 뒤에는 원하는 자료만 쏙 빼어 훔친 뒤 어떤 자료가 사라졌는지 알 수 없게 그곳도 방화했다. 그게 사내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잘 아는 여인을 만나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 태연하지 못하게 뛰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고 남자는 두 손을 들어 보인 채 말했다. 자신은 공격하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꺄악!” 

“진정, 진정하십시오.” 

“조, 조선말?” 

난데없이 아주 반가웠다. 예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움츠렸다. 

“난 전에 당신이 구해 주었던 그 남자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그쪽을 구해 주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진정해요. 여기에 있는 걸 들키면 안 됩니다.” 

“……우읏.” 

자신이 쓸데없이 큰 소리를 낸 게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예달은 저 체격의 남자를 구해준 적이 있다. 목소리도 같았다. 그때와 같이 몹시 낮고 감미롭게 들리는 소리. 밤의 사자(使者)라고 해도 어울릴 것 같은……. 

 

“내가 다가가도 되겠습니까?” 

“네…….” 

예달은 그제야 좀 진정이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그런 예달의 모습에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이윽고 예달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천으로 감싼 뒤 빠르게 안아 올렸다.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는 예달이 겨우 참고 정신을 차려 보자 이미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계속 덜컹거리면서도 사내는 힘 좋게 예달을 계속 들어올리고 있었는데 그게 저도 모르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무력하게 안에서 찔찔 울고 있기만 했는데……. 

 

그렇게 바깥으로 나와서 등을 몇 번 토닥여준 남자는, 예달이 고개를 푹 숙이고 오심을 가라앉히고 있는 동안 사라져 버렸다. 

“여기는…… 응? 저택이잖아…….” 

저택 벽 너머에 있는 수풀이었다. 예달은 여기를 자주 청소하고 가꾸어서 알고 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남자가 귀신같이 자신이 사는 곳으로 데려다 준 게 신기해서 감사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몇 번 불러 보아도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정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감사를 하기 위해 쿠키라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수풀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저 멀리서 보아도 고급스러운 정장을 풀어 헤치고 절뚝거리면서 다가오고 있는 선우진이 보였다. 도, 도련님이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긴장이 풀려서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얼굴을 감싸고 후으, 하며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종종걸음으로 ‘도련님!’하고 부르며 다가가자, 선우진이 고개를 쑥 들었다. 왠지 오늘따라 덜 발갛게 느껴지는 뺨이 씰룩거렸다. 

 

“으응, 아…… 마이코 씨. 잘 지냈나?” 

“도련님…….” 

헐렁하게 셔츠 단추까지 몇 개 풀려 있는 데다가 여자 향수 냄새가 진했다. 오늘도 한 잔을 하고 돌아온 듯했다. 예달은 저도 모르게 훌쩍거리면서 선우진을 부축했다. 그러고 있으니 선우진은 푸스스 웃으면서 마이코 씨, 하고 한쪽 입만 끌어올려 웃음을 흘렸다. 

“하아…… 마이코 씨 향기는 언제 맡아도 기분이 참 좋아.” 

꽃을 단 것 같달까. 그렇게 예달을 알아보지 못하고 키들키들 웃으면서 선우진이 예달을 내려다보았다. 예달은 도련님, 하고 울먹거리더니 고개를 푹 들어 보였다. 이윽고 그의 젖어 있는 입술에다 먼저 입을 맞추었다. 쪼옥,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며 선우진을 꽉 껴안았다. 이윽고 집으로 가요, 하고 애절하게 말했다. 

 

* * * 

 

선우진이 예달을 만난 건 우연한 상황이었다. 

-살려주세요! 

흔치 않은 분홍색 머리칼을 보고 생각했지만 잔뜩 겁을 집어먹고 덜덜 떠는 것과 목소리를 듣고서는 완전히 확신했다. 예달 양이 맞구나, 하고. 화재를 일으켜 부러 침입한 집에 예달이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만은 확고했다. 

……구하고 나서는, 저도 모르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번에도 저택 앞에서 만났으니 그렇게까지 수상하지는 않겠지. 태연하게 사라지고 나서도 선우진은 어리둥절한 예달을 멀리 지켜보며 제 옷을 갈무리했다. 끝까지 단추를 잠그지 않고 중간중간 몇 개를 푼 다음 미리 준비해 둔 독한 향수를 온몸에 점철했다. 완전하게 뒹굴고 온 것처럼. 술을 몸에 바르듯 목덜미에 향수와 함께 바른 뒤에는 살짝 마시기도 했다. 양주를 조금 소분해서 가지고 왔으니 주머니에다 넣고 나중에 몰래 처분하면 되었다. 

 

밤에만 나로 있을 수 있는 삶이, 과연 옳은 것인가. 선우진은 그게 옳은지 틀렸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으로 얼룩진 얼굴을 가릴 수가 없다. 태연하게 살아가는 것은 낮의 일이다. 세상은 이렇게라도 해야 굴러간다. 결딴이 난 듯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일부러 살짝 정돈하고, 그는 숨결을 뱉었다. 술 냄새가 가득하다. 

*술 권하는 사회가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 선우진은 미쳐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정신인 얼굴로 있다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다시 사이온지로 돌아갔다. 

 

 

 

*술 권하는 사회: 1921년 <개벽>에 소개된 현진건의 소설. 지식인인 주인공이 조선 사회는 ‘술을 권하는 사회’라며, 사회 정세를 잘 모르는 자신의 아내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정신이 바로 박힌 놈들은 피 토하며 죽을 수밖에 없지.’ 라는 구절이 나오는 등 상당히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다. 

선우진과 이 주인공의 차이점이라면 주인공은 무언가 시도해 보였지만 권위주의에 의해 무력하게 저물고 있는 인물이지만 선우진은 지식인 층으로서 자신을 숨긴 채 혁명을 꿈꾸는 불길을 가진 사내라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권위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권위를 유지할 방법을 찾는다는 요소로 보았을 때 선우진의 쪽이 좀 더 영리하고 유연하게 사회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