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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그와 그녀의 사생활

푸딩챤 2025. 9. 20. 09:01

 

예달의 홍차 우려내기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티 백을 잘못 뜯어서 티 백에 구멍을 낸 적도 있는 반면 지금은 구멍은 고사하고 빼낼 때까지 시간을 보지 않아도 언제쯤 빼내면 가장 훌륭한 맛을 내는지 가늠이 가능할 정도로 능력이 탁월해졌다. 

예달은 오늘도 선우진에게 가져다 줄 홍차를 타고 나서 뿌듯해했다. 아주 많이 탄 만큼 실력이 느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런 소소한 게 너무 기뻤다. 웃음꽃을 가득 피우면서 홀로 들 뜬 발걸음을 재촉해 다과를 함께 내놓으려 그의 침실로 향했다. 도도도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중에도 혹시나 발이 꼬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열심히 만든 홍차를 대접하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고 그렇게 들어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건 처음 보는 여인의 뒷모습이었다. 늘씬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모습에 화들짝 놀란 예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여인의 너머에는 선우진이 반쯤 누운 채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당한 미녀인 만큼 눈길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불이 덮여 있어 피부 결이 살짝 보일 뿐이었다. 

당황해 우으, 하고 웅얼거리기도 잠시 예달은 여인을 손으로 안고 있던 선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달칵, 하는 소리에 선우진 또한 조금 당황한 듯 무감한 눈에 당황의 빛을 표하고 있었다. 예달은 순간적으로 딸꾹, 소리를 냈다. 

“죄, 흣, 힉, 죄송해요.” 

뒷걸음질을 쳤으면 선우진에게 들키지도 않고 그냥 귀여운 소동으로 끝날 수 있었을 텐데, 그대로 바보같이 뭉그적거려서……. 예달은 자신을 원망하며 그대로 홍차를 엎고 말았다. 벌벌 떨리는 손길로 후다닥 도망을 나오며 문도 쾅 닫은 뒤에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대로 무섭고 두려운 것에서 도망을 치는 소녀처럼 빠르게 발 재간을 놀려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해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은 뒤에는 애꿎은 벽에다가 제 이마를 쾅, 쾅, 쾅, 서너 번이나 찧었다. 

 

늘 쓰리 피스 수트에 넥타이를 차고 다니던 도련님의, 이토록 은밀하고 사적인 모습이라니. 은은한 향수 냄새가 자신의 코를 여전히 찌르는 것 같았다. 베스트를 옆에다가 던져 놓은 채 셔츠도 반쯤 풀고 있었지. 이불에 덮여 있어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런, 걸 하고 있었을 것이다. 립스틱 자국을 자주 달고 오는 도련님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직접 보고 나니 죄악감이 대단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는 걸 넘어 아예 봐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일을 하는 공간 치고는 너무도 어두컴컴했던 방 안의 희미한 불빛과, 아직 뜨겁지 않은 살갗을 데우는 손길들. 손과 살이 얽혀서 이런저런 질척함을 만들어냈을 거란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너무 은밀했다. 언뜻 보이는 옆모습, 짧은 머리칼이 드러낸 고아한 뒷덜미나 어깨에 붙어 있는 근육 따위. 그리고 아름답기 그지 없는 여인을 안은 손길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여인이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내던 것마저도 기억이 난다. 그런 손등에 불거진 핏줄이나, 일순 엿보였던 선우진의 끈적하고 질척한 눈동자 따위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자신은 절대로 볼 수 없을 눈동자였다. 세세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자꾸 촘촘하게 기억 사이를, 세포를 마구 짓이기고 있었다. 예달은 부들부들 떨면서 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고, 자신의 머리를 콱 쥐어 뜯었다. 그리고 또 다시 머리를 쾅, 쾅, 박았다. 

도무지 진정이 잘 안 됐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인님의 사생활을 함부로 엿보는 메이드라니, 이건 메이드 실격이었다. 그리고 선우진도…… 도련님도 많이 당황하신 것 같았지.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죄송한 마음이 더 컸다. 정말로 아주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예달은 죄악감과 부끄러움, 그리고 그런 중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달뜬 숨결 소리를 생각하며 아으윽, 하고 울먹거렸다. 정말 칠칠치 못한 자신의 실수라고 생각하니 그만 죽고 싶어졌다. 어떻게 하면 이 부끄러움과 죄송함을 이길 수 있을지 부들부들 떨면서 침대에 뒹굴뒹굴 머리를 마구 비비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저택에서 자신을 부를 만한 사람은 도련님뿐이었다. 예달은 눈동자 곁에 맺힌 물을 떨리는 손으로 꾹, 꾹 닦아낸 뒤에 얼른 나갔다. 통통 부은 눈길로 바깥을 내다보자 선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셔츠도 평소보다 조금 허술하게 사이사이가 열려 있었고, 바지춤도 평소보다는 덜 깔끔했다. 조금 급한 티가 역력했다. 급한 숨을 몰아 쉬면서 숨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 도련님.” 

예달은 놀라서 말문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우으, 하며 눈을 끔뻑거렸다. 

“예달 양.” 

부스스한 머리칼이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채 여기저기 휘어 있었다. 그는 뒤늦게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 하며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하는 것보다는 미안하다는 눈치가 더욱 강했다. 문을 제대로 잠그거나 좀 더 주의를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담겨 있었다. 선우진은 여전히 당황해서 톡 건드리면 엉엉 울 것 같은 예달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잡고 아이를 달래듯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많이 놀랐겠네.” 

미안해요. 예달에게 사과하고 있으니 예달은 바들바들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사과를 하는 사람인 선우진보다도 더욱 당황해서 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달은 이 상황이 너무 죄송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리 봐도 하던 중에 자신이 난입한 나머지 신경이 쓰여서 급하게 갈무리하거나 상대방을 밀어내고 자신에게 찾아온 모습이 아닌가. 이건 옳지 않았다. 자신이 뭐라고, 도련님의 중요한 사생활을 방해하겠나 싶었다. 후다닥 나온 모습은 이때까지 봐 왔던 선우진의 모습 중 가장 흐트러져 있었다. 그게 못내 미안하고 또 송구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저 사생활이 아니라 그러니까, 좀 더 은밀한 사생활인 만큼 미안한 마음도 더욱 짙어졌다. 심지어 그런 모습을 직접 봐 버리다니. 모든 걸 다 본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가 눈이 있어서 봐 버렸다는 게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본 것까지는 괜찮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계속 생각이 났다. 몸이 달아 있어서 뜨거운 숨을 뱉는 모습의 도련님이 자꾸 떠올랐다. 그게 얼마나 초조한 일인지 도련님은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런 나쁘고 엉큼한 자신을 달래 주려고 부러 나오셨다.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똑똑 날 지경이었다. 

그녀는 후으, 하고 부르르 떨다가 이내 울음을 결국 터뜨렸다. 우으앙, 하고 엉엉 목 놓아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모습에 선우진은 화들짝 놀라 어깨까지 튀겼다. 

 

“예달 양……. 예달 양, 이리 와요. 괜찮아요, 내가 미안해요.” 

선우진이 얼른 다가와 예달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등을 토닥토닥 안정된 리듬으로 두드려 주어도 울음은 쉽게 멎지 않았다. 이런 사생활을 어렴풋이 알고 있더라도 직접 목도할 줄은 몰랐겠지. 놀란 마음이 컸을 것이다. 원래 순진하고 순박한 그녀가 이런 걸 보고 싶었을 리는 없을 텐데, 놀란 나머지 울음이 나왔나 보다. 선우진은 좀 더 조심할 것을, 하고 후회했다. 숨을 삼키면서 부드럽게 도닥거리기를 한참이었다. 예달의 몸에는 다른 여자의 살내음이 사르르 배기 시작했다. 선우진은 안 그래도 놀랐는데 냄새가 달라져서 더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최선이었다. 

‘예달 양이 많이 놀랐나 보네…….’ 

좀체 울음을 그치지 못하던 예달은 바뀐 향수 냄새를 느끼면서 히끅, 흐윽, 하고 어깨를 꿀떡거렸다.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잇새에서는 무언가 말이 나오고 있었지만 선우진은 듣지 못하고 그녀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하면서 그저 달래기만 했다. 예달과 선우진은 동상이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제야 좀 진정하자 어깨가 멎었다. 후으, 하고 숨을 폭 내쉬고 있으니 선우진이 예달의 몸을 살짝 떼어 놓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달 양, 이제 좀 괜찮아요?” 

그는 셔츠에 예달의 얼굴 모양대로 생겨난 눈물을 바라보며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여인의 립스틱에 이어 눈물 자국이라니, 아무리 봐도 천하의 몹쓸 놈 룩(look)이었다. 두 여자를 동시에 껴안은 것만 같은 모양새다. 이렇게까지는 원치 않았는데. 

“후읍, 우…… 괜찮, 아요. 죄송해요, 도련님. 제가…… 갑자기 울어서, 많이 놀라셨죠.” 

선우진에게는 민폐만 끼치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접시를 깨지를 않나, 엊그제는 옷을 잘못 빨아서 얼룩을 만들지를 않나, 오늘은…… 하아. 예달은 울음 때문에 달아 있는 숨결을 푹 뱉으면서 우물쭈물 말했다. 선우진은 인자하고 보드라운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으응. 아니야. 많이 당황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그것 보다는…… 아, 아, 니에요. 그냥……. 도련님, 죄송해요.” 

솔직하게 말하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다. 예달은 정말 염치 불고하지만 숨겨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또 죄송해요, 하고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 말에 선우진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처음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늘 훤히 보였는데. 얼굴을 살짝 불그스름하게 하고 있는 것도 울음 때문이리라 생각하니 늘 해맑아 보이던 예달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왜 궁금할까……. 

 

“이제 예달 양 예쁜 얼굴에 내리던 비도 그쳤으니, 달달한 거 먹으러 갈까요.” 

예달의 눈가에 맺힌 눈물자국을 톡톡 손가락으로 비벼서 쓸어 주었다. 눈물은 금세 말라붙었다. 물길이 나 있던 곳도 선우진이 섬세하게 닦아주었다. 도련님의 손수건 냄새. 자신이 늘 세탁해서 알고 있지만 새삼스럽게 두근거렸다. 

예달은 양심이 없는 것을 알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진은 그래요, 하고 고개를 함께 주억거리면서 손목 시계를 바라봤다. 

“내 꼴이 지금 이래서, 당장은 힘들고…… 얼른 샤워하고 옷 입고 나올게요.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방에.” 

그리고, 홍차 잘 마셨어요. 예달 양. 선우진은 그리 말하면서 몸을 돌리려고 했다. 예달은 샤워한다는 그의 말에 또 반응해 헐벗은 선우진의 몸을 상상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우진의 자비로운 홍차 언급에 화들짝 놀라 울음을 콱 터뜨리고 말았다. 죄책감이 온몸을 옥죄었다. 

“흐윽, 우으앙……!” 

눈물을 또 뚝, 뚝 흘리는 모양새에 선우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예달을 또 한참 달래야 했다. 여전히 그는 영문을 몰랐다. 이렇게까지 우는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궁금하기도 했다. 늘 명석한 얼굴로 곱게 도박에 임하던 그는 메이드 하나의 마음을 처음으로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다정하게 예달을 달래 주면서 복잡미묘한 얼굴로 미소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