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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할로윈 시크릿

푸딩챤 2025. 9. 20. 09:19

 
겨울이 문 앞까지 다가와 있었기에 예달은 옷을 더 여몄다. 두꺼운 옷을 찾기에는 너무 이르고, 얇은 춘추복으로 밤거리를 거닐기에는 날이 찬 탓이었다. 찻잎을 미리 사두었어야 했는데. 예달은 낮에 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신발을 마저 고쳐 신었다. 가게 문이 닫히기 전에 가려면 지금 나서야 했다. 대로로 나가자마자 건너편 골목을 끼고 오른쪽으로, 그리고 대로가 나올 때까지 직진. 예달은 머리로 길을 그리며 발을 재촉했다. 
 
막 대로를 빠져나와 골목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을까. 등골을 훑는 소름에 예달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봤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 밝게 뜬 달만 환하게 길거리를 비추는 가운데 스쳐 지나가야 했을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예달은 고개를 돌려 골목의 사이를 바라봤다.
부둥켜안은 두 사람, 그러나 남자의 품에 안긴 남자는 어딘가 이상했다. 만취한 듯 다리가 풀려 당장이라도 스러질 듯싶었다. 품에 남성을 앉은 남자는 안은 남자보다 체구가 작았으나 마치 그가 제 다리로 버티고 있다는 듯 지지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친구를 부축하나. 예달은 곧 제 생각을 고쳤다. 쓰러졌다. 그것도 피를 흘리며, 아니 빨렸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품에 안긴 남자는 이미 정신을 잃은 듯, 무게를 지지하지 않은 다리가 바닥을 끌고 있었다.
예달의 손에는 손양초 하나 없었지만,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목에 구멍이 난 채로 고개를 뒤로 젖힌 남성. 그리고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는 미형의 남성. 미형의 남성 입가에 묻어있는 붉은 핏자국까지. 
예달은 그대로 몸을 돌려 들어왔던 골목으로 달렸다.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대로변을 왼쪽에 두고 다시 오른쪽으로 틀어 돌아갔다. 골목골목은 마치 미로 같아서 자신을 쫓아오지는 못하리라. 예달은 정신없이 달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넘어질 것 같으면 이따금 벽을 딛고 발을 움직였다. 골목이 나오면 돌고, 다시 나오면 또 돌고를 반복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본 것이, 늘어진 남자를 안고 입가에 피를 가득 묻힌 것이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이었기에. 예달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선우진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을 마주한 예달이 비명 하나 없이 내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예달이 뱀파이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헛소리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는 그다. 그렇지만 그런 그가 예달을 따라 달리고 있다면. 그럼 말이 좀 달랐다.
선우진은 골목에서 인기척이 들려왔을 때는 몸을 숨기려 했다. 문제가 있다면 몸을 숨기기에는 다가오는 발걸음이 제 생각보다 빨랐다. 섬뜩함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발걸음이 느려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가오는 사람은 평인보다 둔한 편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의 반응이 늦은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선우진은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가 가벼운 것을 보니 여성 일터다. 체구가 좀 작나. 아이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발견하면 겁을 줘서 쫓아내면 그만이었다. 평소였다면 들키지도 않았겠지만, 뱀파이어의 존재를 소리쳐 외친다고 한들 누군가의 헛소리로 치부될 것이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뒤돌아 달아나는 여성을 보고 선우진은 내심 안도했다.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우진은 고개를 살짝 돌린 순간 보고 말았다. 골목 담 안쪽으로 사라지는 분홍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이것이 선우진이 예달을 쫓는 이유였다. 지금 쫓아가서 예달을 잡으면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것을 확신하는 꼴이지만, 잡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의 얼굴을 본 예달이 저택을 나갔을 것을 반쯤 확신했다. 예언자임을 숨기고 있다며 살려달라고 말하던 그녀가 아니던가. 예달을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몇 골목이고 지켜보듯 놓아준 것은 일말의 망설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골목골목, 용하게 넘어지지도 않고 아슬하게 잘 달리는군. 선우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예달은 가려던 가게에서 한참 벗어나 대로를 앞두고 발을 멈췄다. 황색에 흐릿한 가로등이 에 보이자 그제야 숨을 고르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기 시작했다. 그런 예달을 잡아채 골목으로 데려간 것은 선우진이었다. 골목에서 붙잡힌 예달이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선우진은 예달의 입을 틀어막았다. 
예달은 제 몸을 틀어 제 입을 막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직 피 냄새도 다 지우지 못한 제 도련님이었다. 그 순간 튀듯 놀랐던 예달의 긴장이 단숨에 녹아내렸다. 선우진은 제 앞에서 긴장을 녹여 울상이 되어가는 예달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봤다. 동시에 의아해졌다. 아직 송곳니도, 검은 옷에 가려져 있지만 피 냄새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을 보고 도망치길래 골목으로 끌어 입까지 틀어막았으나 저를 보고 지은 표정은 눈에 물 뿌린 듯 녹는 안도였기에. 선우진은 저도 모르게 틀어막았던 예달의 입을 놔주었다.
 
“놀랐잖아요. 도련님.”
예달의 반응은 마치 제가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예달을 놀랜 것과 다름없을 정도의 가벼운 탓함이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예달은 사람이 없는 대로변을 쓱 살펴보고는 선우진의 손목 어드매를 잡아끌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요.
그 말에 도리어 놀라는 것은 선우진이었다. 선우진은 그제야 제 송곳니를 숨기고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잡히지 않은 손으로 꼼꼼히 닦아냈다. 그리고 예달을 추궁하지 않았으나 예달이 하는 이야기를 말없이 들었다. 예달은, 마치 자신이 도련님의 사생활을 알아차린 것처럼 굴었다. 어떻게 보면 사생활이 맞긴 했으니, 존중받아야 할 사생활을 의도치 않게 침해한 듯이 굴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터다.
 
“놀라서 도망친 건 맞아요.”
그렇지만 절대, 도련님이 무섭거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도련님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방해가 될까 봐. 괜히 그 골목에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사람들은 다급한 거나, 달리는 발소리에 위협을 느낀다고 하니까 제가 달리면 사람이 더 안 올 것 같기도 했고요…. 
예달은 목소리를 낮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연신 사람이 있나 살폈다. 선우진이 변명을 요한 것도 아니었으나, 작은 목소리로 예달은 자신이 달아난 이유를 나름 열심히 설명했다. 그마저도 얼마 안 가 끊어지자 예달은 제 머리가 푹푹 익어간다고 생각했다. 팔을 놓기에도 애매해 발을 재촉하고 있음을. 선우진도 알고 있었다. 그저 선우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예달의 말을 토대로 예달의 생각을 정리하며 그렇군요. 하고 짧게 답해주는 것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예달은 주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사용인조차 나와 있지 않은 것을 보며, 그제야 예달은 선우진의 눈치를 더욱 살피기 시작했다. 선우진은 예달의 행동만 보고 드디어 자신에게 진즉 물어봤어야 하는 질문이 되돌아오겠거니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달은 자신의 양손을 내려 한 번 꽉 잡았다가, 결심을 했다는 듯 선우진에게 존재를 물어왔다.
“도련님은, 흡혈귀…. 이신 거요?”
 
그제야 선우진은 떨리는 예달의 어깨를 발견했다. 무서웠겠구나. 저도 모르게 망설였다. 아니라고 대답할까. 그랬다가는 오밤중에 남성을 문 사람이 되어버린다. 변명하면 들어주고 믿어주겠지만 살인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워줄 수는 없겠지. 선우진의 대답은 깔끔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말에 긍정하는 선우진을 본 예달은 자신의 도련님이 뱀파이어였다니! 하고 놀랄 뿐 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행동이 조금 더 부산스러워질 뿐이었다. 
 
선우진은 오늘 밤만 두 번째 놀랄 뿐이다. 그간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모든 이들은 예달처럼 행동하지 않았기에. 동시에 행동한 이는 있어도 그 원초적인 공포를 지울 수는 없었기에. 비밀을 유지해달라고 말하자. 선우진이 속으로 결심하고 막 예달을 진정시켰을까. 겨우 찾아온 적막 속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예달이었다. 우, 우리 도련님이 뱀파이어라니…!
“평생 비, 비밀로 할게요!”
무덤까지 가지고 들어갈게요…! 선우진은 자신이 말하기 전에 먼저 비밀을 약속하는 예달을 또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예달 양. 그리곤 평소처럼 살포시 웃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예달은 금방 방에서 나갔다. 좋은 밤이 되라며 건네는 저녁 인사도 한결같았다. 선우진은 예달을 보내고 침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발걸음을 떼지는 않았다. 선우진은 예달에게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왜 놀라지 않았는지, 더 캐묻지 않는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 정체를 밝힐 때마다 따라붙던 말들이 들려오지 않고 연신, 자신의 앞에서 긴장을 녹여 내리던 예달의 눈을 그렸다. 어리둥절하다. 그것이 선우진의 감상이었다. 
그리곤 깨달았다. 자신도 예달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정확하게는 예달을 배려해 물어봐 주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곤 제 머리를 정리했다. 예달이 뱀파이어인 자신을 모시는 것보다 저택에서 나가는 것이 더 싫었을 거라고.
 
선우진은 평소보다 조금 더 어벙한 아침을 맞이했다. 자신을 부른 목소리에 눈을 떠 버릇처럼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어스름한 아침 햇살, 밤이 길어지기는 했으나 창가로 들이쳐야 할 햇살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선우진은 아직 제 방에 커튼이 쳐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곤 깨달았다. 예달이 밤새 뭔가 잔뜩 준비해왔다는 것을. 그것도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지식적인 측면으로. 늘어진 눈그늘과 이따금 하는 하품으로 보면 밤도 샌 모양이다.
 
예달 덕분에 선우진은 햇살이 들이치지 않는 하루를 보냈다. 책을 읽기에는 좋았으나 마늘과 은이 없는 식사를 하고, 성경책과 십자가에서 먼 하루를 보냈다. 
저녁쯤이 되어 선우진은 슬슬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이 모든 낭설을 어디서 듣고 와서 이렇게 행동하는지. 예달의 시간을 추측하며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막막해져 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속에서부터 옅은 웃음이 쏟아졌다.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조금 더 둘까. 그런 선우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달은 뭘 경계하는지 연신 창밖을 기웃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