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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다정하고 악한

푸딩챤 2025. 9. 20. 09:22

 
빌어먹을 어별교 놈들! 감히 사이온지 선생의 피와 살 같은 돈을……. 놈들은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놈들을 꼭 찾아서 처단하겠습니다. 사이온지 선생, 너무 심상하지 마소. 괜찮을 거요. 제각각의 목소리가 ‘사이온지’를 위로했다. 선우진은 다치지 않았다. 그저 팔에 깁스를 둘렀을 뿐이다. 하지만 팔에 깁스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군인과 경찰들은 사이온지를 피해자라고 단정 짓고 그를 서둘러 모시다시피 했다. 그 결과 그는 피해자로 조사를 받게 되었고, 통상적인 조사가 아니라 단순한 위로의 말을 건네어 듣는 일을 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선생.” 
“어별교 놈들이 나를 밀어 넘어뜨린 뒤 그대로 도망갔소. 그 뒤로는…… 글쎄, 어디로 갔는지.” 
쯧. 그가 미간을 좁히면서 사이온지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고고한 일본 화족 남성은 아무렇지 않게 언짢은 티를 냈다. 그러자 귀한 손님이 화를 낸다는 게 적잖이 불안했던 다른 일본 순사들은 괜찮을 것이라 며 자신들의 충성심을 내비쳤다. 그 모습에 선우진은 그렇소,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엷게 웃었다. 
 
곁에 있는 예달은 입술을 꾹 짓눌렀다. 다친 도련님을 부축하기 위해 몸종 된 자로서 함께 같이 왔지만 …… 기분이 석연하지 않았다. 게다가 도련님이 다치신 데다가…… 그 남자와 적대 관계가 되었다. 그 남자가 어별교인지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순사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는 도련님의 모습을 보아 그 남자와는 적대 관계가 된 것이 분명했다. 그 분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도련님은 정말로 다정하다 못해 마음을 꽉 죄어 올 정도로 착한 분이지만, 사실은 나쁜 분일 수도 있다는 걸 자각하자 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불쾌한 것도 그렇다고 해서 좋은 것도 당연히 아닌 상태였다. 예달은 며칠 전 자신에게 선우진이 맞추어 준 옷을 꾸욱, 손톱으로 짓누르면서 버텼다. 그 자리의 옆에 서서 일본어를 귀동냥하고 있으니 기분이 더욱 미묘해졌다. 그저 눈썹을 내리깔고 있었다. 
 
예달은 그 날 이후로 도련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도련님에게서 벗어나 객관적인 도련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래서 도련님이 가시는 곳이면 곳마다 자신도 함께해야 한다며 주장하면서 선우진을 따랐다. 
“이런 곳까지 올 필요는 없는데, 예달 양.” 
“도련님이 팔을 다치셨으니까, 저도 곁에서 보필하고 싶어요. 가게 해 주세요.” 
고집이라는 걸, 아니, 그걸 넘어서 아집이라는 걸 알면서도 보고 싶었다. 선우진이 어떤 사람인지. 그러면서도 반은 진심이기도 했다. 팔을 다쳤으니 곁에서 보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정말 복잡한 마음이 들었는데도 예달은 꼭 거짓말을 하고 있는 듯해서 양심에 콕콕 찔렸다. 
그녀는 동그랗지만 처져 있는 눈을 빛냈다. 콧잔등에 있는 주근깨도 함께 깜찍하게 움찔거렸다. 그러고 있는 모습에 선우진은 미묘한 웃음을 품은 채였다. 그 웃음에 예달의 가슴은 쿵덕쿵덕 뛰었다. 설렘이 아니라 새로운 선우진의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자신의 거짓된 발언 때문에.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심장이 뛰고 마는 예달이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었군요.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도련님의 모습은 고아해 보였다. 사이온지 도련님의 모습을 그렇게 바라볼 때마다 예달의 마음은 어쩐지 요동쳤다. 그래서 더욱 가고 싶었다. 다행히도 허락을 받은 뒤에는 여러 곳을 따라다녔다. 
“도련님, 아 하세요.” 
“……아.” 
손가락을 움직이기 어렵게 깁스를 해 두었으니 밥도 먹여 주었다. 예달은 숟가락에 적당한 밥을 뜨고 젓가락에는 다른 반찬을 집어서 그가 쉬이 먹을 수 있도록 건넸다. 선우진은 팔을 실상 다치지 않았으니 어쩐지 예달에게 미안해졌지만 그냥 고분고분 입을 벌리기도 했다. 
술을 마실 때도 함께 따라가서 그에게 술을 따라 주기도 했다. 쪼르륵, 자그마한 술잔에 채우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 쏟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선우진의 면이 서지 않게 다른 남자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예달은 아주 열심히 했다. 
그렇게 취한 선우진이 집으로 돌아갈 때면 익숙하지만 매일 다르게 느껴지는 여자 향수 냄새를 맡으면서 그의 허리를 부축하기도 했다. 물론 제대로 걸어갈 수 있는 상태였지만 조금 알딸딸하게 기분 좋게 취한 선우진의 모습을 본 예달은 멈추지 않고 주저 없이 다가갔다. 
 
“도련님…… 팔을 벌려 주시겠어요.” 
집에 돌아와서는 몸에 여전히 힘이 조금 없는 선우진에게 다가가 유카타의 끈도 매 주었다. 양 옆으로 펼쳐진 유카타를 안에 입은 속옷이 보이지 않도록 다소곳이 감쌌다. 얼굴이 붉어지는 걸 무릅쓰고 그녀는 열심히 옷의 매무새를 다듬었다. 불필요한 주름이 지지 않게 손을 살포시 집어넣어 조심스럽게 열심히 다듬으면서 몸을 어쩌다 더듬거리고 있으니 예달은 괜한 생각이 들어서 얼굴이 시뻘게지고 말았다. 
“예달 양, 이렇게까지는…….” 
굳이 예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을 부탁해도 되는 것이었다. 선우진이 먼저 눈치를 채고 한 발 물러 나려고 하자 예달이 괜찮아요, 하며 흘금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지만 새빨갛게 드러난 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녀의 귓불에 달려 있는 체리보다도 더욱 붉게 물들어 있는 귀가 새삼스레 꿈틀거렸다. 
 
그렇게 예달은 선우진의 24시간을 모두 관찰하고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털레털레 돌아와 눈을 내리깐 예달은 도련님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의 방에 있는 테이블 앞에 다리를 모으고 앉은 채로. 
‘도련님은, 선한 사람은 아니야.’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매일 뻑뻑 피운다. 이것만으로 사람이 선한가를 가릴 수는 없지만 유흥을 적잖이 즐기면서 여러 여자와 노는 등 어쩌면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같다. 도박이나 하는 모습도 사실 올바른 모습이 아니다. 같이 노는 무리들도 다 가난한 백성을 착취하여 돈을 버는 쓰레기인 사람들이다. 부자라곤 하지만 졸부에 가깝고, 도덕심이 없는 사람들. 말하는 것들도 저급한 때가 있다. 그런 농담이 뭐가 웃긴지 도련님은 그걸 보면서 픽, 웃고는 한다. 그렇지만……. 
‘예달 양. 표정이 어두운데 무슨 일 있어요?’ 
고민이 있나? 선우진이 그리 물을 때는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천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다정하고 예쁜 얼굴로 섬세한 속눈썹을 제게 쏟아주는 도련님이 떠오른다. 예달은 일순 속에 오심이 이는 걸 느꼈다. 역겹다든가 그런 게 절대로 아니다. 그저…… 그저. 알 수 없는 괴로움에 시달릴 뿐이다.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모든 것을 다 게워낸 예달은 후으, 하고 괴로움에 차 캑캑거렸다. 울렁거리는 속은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다정하고 악한 도련님을 떠올리면서 한 번 더 괴롭게 기침했다. 자신 의 모든 기반을 다져 준 도련님과, 남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는 사이온지의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