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도련님
좋은 아침, 상쾌한 아침! 예달은 유난히 좋은 아침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늦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얼른 옷을 갈아입고 후다닥 선우진을 찾았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게 될까 궁금함을 품으면서 저택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만나는 건 여전히 정체를 잘 모를 험상 궂은 남자들-선우진이 고용한 자들-뿐이었고 선우진은 없었다. 마지막 보루로 도련님의 침실로 향하고 있으니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도련님이 오늘은 나를 깨우지 않았을까?
예달이 처져 있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뚜벅뚜벅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 ‘도련님, 들어갈게요’ 하며 안으로 몸을 들였다. 그러자 선우진은 보이지 않았고 갈색 털을 가진 아기 여우가 침대에 있었다. 다 큰 여우에 비해서 너무도 작은 데다가 체구가 작은 예달의 눈에도 자그마하게 보일 정도였는데, 베개에 떡하니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침대에 있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여우는 발로 귀를 긁적거리면서 민들레 홀씨 같은 털을 팔랑이고 있었다.
예달은 여러 번의 난감한 경험으로 인하여 이제는 직감했다. 도련님이 여우가 되셨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의 침대인 것처럼 이렇게 자연스러울 리가 없었다. 마침 도련님도 보이지 않으니까 그게 당연해 보였다.
그녀가 꺄- 하고 다가갔다. 여우는 겁도 없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까만 눈동자를 예달에게로 고정시킨 채 그녀에게 안겼다.
“도련님, 언제 여우가 되셨어요!”
예달은 방긋 웃으면서 선우진-이라는 이름의 여우-을(를) 품에 안고 뾰족하고 도톰한 귀 사이를 얼른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느낌이 너무 좋았다. 자그마한 몸뚱이만큼 커다란 데다가 북실북실 털이 달려 있는 꼬리가 아주 부드럽고 사랑스러웠다.
아침이 되었으니 도련님이 배가 고플 것 같아서 그 중에서도 얼른 준비했다. 요리사에게 간곡히 부탁하면서도 도련님이 여우가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게-왠지 함부로 말하고 다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 이었다, 도련님은 중요한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어렵기도 했고 갑자기 고기를 간도 없이 제대로 익혀만 달라는 예달의 부탁 때문에 주방장의 시선이 곱지 않기도 했지만, 아무튼 선우진 찬스(?)를 써서 말하고 나자 요리사도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주어 다행이었다.
예달은 여우가 먹을 만한 익은 고기를 예쁘고 낮은 접시에다 담아 얼른 먹였다. 그리고 굶주린 여우가 컁컁 소리를 내며 열심히 먹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여우는 선우진의 성격과는 다르게 어쩐지 조금 깔끔하지 않게 먹고 있었다. 도련님은 여우로 사는 게 많이 어렵나 보다.
“도련님! 눈곱이 이게 뭐예요.”
하긴, 도련님도 여우는 처음이시죠? 제가 떼어 드릴게요. 이 참에 털도 꼬질꼬질하니 이번에 씻기로 해요. 여우는 갯과니까 고양잇과처럼 목욕을 시키는 데에 힘들지도 않겠거니 싶어 안심이었다.
다행히도 예달의 예상은 맞았고, 여우는 아무렇지 않게 어리둥절한 눈길로 세면대에 몸을 담그게 됐다. 너무 자그마해서 세면대에 꼭 차는 몸집인 게 너무너무 귀여웠다. 예달은 꺄아,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정말 작고 가느다란 뼈를 덮고 있는 살과 털을 얼른 씻겼다.
“도련님, 제가 목줄을 사 왔어요. 도련님이 어디에서 길을 잃으시면 누가 찾아 줘야 하니까요!”
<사이온지 유우야> 라고 일본어로도, 조선말로도 씌어 있는 목줄을 구해 얼른 사 왔다. 사람일 때의 기억이 있으셔서 기분이 많이 나쁘실 수 있겠지만 괜찮다고, 여우들은 이게 일상일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야생성을 무시하는 말도 했다. 이름표를 달아 주고 연락처와 이름을 함께 굽어보니 너무너무 귀여웠다. 갈색 여우는 선우진일 때와는 정말 다르게 눈도 아주 동그랬다.
“도련님이 어릴 때도 이러셨을까요? 눈이 너무 예뻐요!”
방방 뛰면서 좋아하다가도, 도련님이 안 돌아오시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났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어찌 되었건 좋은 해결이 되기는 했지만……. 혹시나 말이다. 도련님은 하는 일도 많으신데 정말로 안 돌아오면 하루의 유희거리로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흐음, 하고 고민을 해 보다가 냅다 여우의 주둥이 끝 까망코에 뽀뽀를 남겼다. 쪽! 쪽! 두 번이나 귀엽게 키스하고 나서는 연기가 풍겨져 나오며 선우진의 알몸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없었다……. 동화에서는 보통 뽀뽀를 하면 돌아오던데.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도련님께 걸맞은 주인공이 따로 있는 걸까? 예달은 시무룩해졌다.
여우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깽, 하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별로 날카롭지 않은 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예달은 우으으, 하고 그 자그마한 것을 꼭 껴안으며 침대로 향했다. 이내 여우가 답답하지 않도록 가느다란 팔을 팔베개 삼아서 여우를 베갯잇에 눕혔다. 그리고 그 포근하고 보드라운 감각에 취한 예달은, 도련님이 없지만 있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대로 잠들었다.
그 시각, 진짜 선우진은 집에 들어왔다. 예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용건을 처리하느라 새벽 일찍 나갔었는데 이렇게 늦을 줄이야. 예달 양이 제법 이상하게 생각하겠군. 어떤 알리바이를 대면 좋을지 몰라 일단 여자 향수를 염두에 두고는 있었는데…… 예달이 혹여나 자고 있나 싶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달은 자고 있었다. 그런데…….
‘여우?’
개인 것 같기도 하고 여우인 것 같기도 하지만, 주둥이가 제법 긴 데다가 귀가 뾰족하니 개는 아닌 것 같았다.
“우음, 냠……. 도련님, 여우가 되셔도, 제가 돌봐드릴게요…….”
여우가 된 도련님을 제가 잘 챙길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예달이 중얼거 렸다. 선우진은 예달의 말을 자세히 들어 본 뒤, 여우를 함께 번갈아 보았다. 그렇구나. 금세 이해가 됐다.
흠. 그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이 여우가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예달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이 여우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매우 뻔한 일이었다. 예달은 정이 아주 많았으니까. 게다가 이렇게 착해 보이고 예쁜 여우라니, 솔직하게 말해 자신도 ‘요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여우를 키우는 방식을 모르기도 하고 어떤 문제가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더군다나 자신이 정말로 사람이었는데 사라졌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역시나 정이 많은 예달이 무슨 일 이 있었던 것이냐며 걱정할 것이다. 웃으면서 대답해도 새벽 일찍 말도 없이 나가는 건 아주 수상해 보이기 짝이 없기에 예달은 어쩌면 새벽마다 일어나서 어디 가시는 거 아니죠? 하며 자신을 의도치 않게 의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역시나 사양이었다.
선우진은 어느새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침 여우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미동을 보였다. 그 까만 눈동자는 조선인의 것처럼 정말 맑고 예뻤다. 선우진은, 예달이 이 여우를 자신으로 착각하는 게 왠지 기분이 오묘해졌다.
그리고 그 여우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깽깽 짖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 건 전혀 없고 오히려 부드럽게 품에 파고들면서 턱 밑을 핥아 주었다. 아주 유순한 녀석인 듯도 싶었고 어릴 때부터 인간의 손을 탄 듯 보였다. 선우진은 그 여우가 왔을 법한 보금자리로 녀석을 돌려보냈다. 저택의 뒷산에서 간혹 짐승이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온 곳은 안 봐도 뻔했다. 다행히도 여우는 별로 불만 없이 꼬리를 살랑거리더니, 선우진의 다리에다 자신의 주둥이를 몇 번 비비적거린 뒤 홀라당 가 버렸다.
이윽고 아직 자고 있을 예달의 곁으로 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건드렸다.
“우음, 냐, 여우야, 우응, 도련, 도련님?!”
“……깨워서 미안해요. 그런데, 말도 없이 사라지면 또 걱정할 것 같아서.”
“도련님, 돌, 돌아오셨어요?”
예달은 한 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응. 예달 양 덕분에 사람이 되었어요.”
고마워요. 그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예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아 몽롱한 채 있던 예달의 손등에다 가벼이 키스를 남겼다. 예달은 터질 듯 시뻘건 얼굴로 아니에요, 할 일을 한 거예요,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