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 메이드가 남자면 역시 곤란한가요?
예달은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마지막 갈무리로 리본을 묶는 것이 아니라 뉴스 보이 캡을 썼다. 치마로 된 메이드복이 아니라 하얀색 셔츠와 체크 무늬 바지, 그리고 멜빵을 어깨에 걸쳤다. 키에 맞도록 제대로 조이고 적당히 어깨를 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예달은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남자가 된 것은 겨우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슬픔은 잠시였다. 시대적 상황 때문에 여자라면 제약이 많지만 도련님과 같은 남자가 된다면 할 수 있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사이온지 도련님을 따라서 도박장에 갈 수 있었다. 도박장이라고 하니 무서운 마음이 많이 들렸지만 도련님을 지키기 위해서(?) 라면 자신이 조금 무섭더라도 무조건 불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함께 동행하겠다고 했다. 굳건한 예달의 얼굴을 본 선우진은 으음, 하고 잠시 망설이더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도착한 도박장은 카페 같은 분위기였지만 흡연이 가능한 장소였고, 전반적으로 정돈이 되어 있었으나 분위기가 험악해서 무서운 곳이었다. 사람들의 인상도 좋지 않았다. 인상을 쓰고 있는 남자들이 많았으며 특히나 흥분해서 소리를 높이는 사내도 있어 예달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포커 룰을 하나도 모르는 예달이었으니 선우진과 함께 즐길 수도 없어서, 그는 그저 가만히 덩그러니 선우진의 곁에서 선우진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기만 했다. 사실 온 게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선우진의 멋진 모습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고 생각하자 그런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아무튼 예달은 선우진이 물이나 커피를 원한다고 하면 후다닥 달려가서 그의 취향대로 커피를 사 오거나 했다. 도박장이었지만 바리스타와 바텐더가 함께 있는 신기한 곳이었다.
‘역시 도련님이 다니는 곳은 뭐가 되었든 고급이고, 신기한 데가 많구나…….’
그렇지만 술을 끊임없이 들이 부으면서 제정신이 아닌 채로 담배를 거의 씹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뻑뻑한 담배 연기가 코를 간질여서 콜록거리기 바빴는데, 그럼에도 예달은 먼저 나가지 않고 선우진의 곁을 지켰다. 혹시나 나쁜 일이 있으면 자신이라도 있어야 도련님을 지킬 수 있다는 하찮고 귀여운 생각 때문이었다. 선우진이 예달 몰래 덩치가 큰 고용인들을 10m 뒤에 따라오도록 동행하게 한 것은 여전히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무서운 사람들이다!’ 하고 생각할 뿐인 예달이었다.
“예달…… 군, 잠시 나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요?”
저도 모르게 예달 양이라고 할 뻔했는데, 머리카락이 짧아진 채 바지까지 입고 있는 예달을 보자 말을 금세 고칠 수 있었다. 선우진은 엷게 웃으면서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꺼냈다. 담배를 피우러 갈 것인데 예달은 비흡연자였으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자 예달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이 가시는데, 가야죠! 저도 같이 갈게요.”
오늘따라 더욱 더 졸졸 따라오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지만 무서운 것도 많아서 떨어지기 싫은 거겠지. 남자인 선우진이 봐도 이 곳이 치안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담배 냄새가 이미 온몸에 배어 버릴 정도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담배 연기가 실내에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바로 옆이 흡연장이라 냄새가 이쪽으로 흘러 들어온 탓에 이 공간은 모두 연기로 자욱했다.
바깥으로 나오자 더욱 더 생경하게 느껴지는 바깥 냄새와, 자신에게서 나는 기묘한 향기가 다른 사람들의 향수 냄새와 섞여서 더욱 더 난잡해졌다. 예달은 킁킁거리며 자신에게 혹시 이상한 냄새라도 밴 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고 있다가, 홀로 흡연장으로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 선우진의 뒤꽁무니를 얼른 쫓아 갔다.
후다닥 다가가서는 불을 붙이는 선우진을 눈앞에서 바라보았다. 이런 걸 보는 건 처음이라, 예달은 저도 모르게 어리숙한 목소리로 ‘우와아’ 하며 놀랐다. 불빛을 받은 선우진은 평소와는 다른 퇴폐적인 분위기가 나면서도 고아한 느낌이 있었다. 지포 라이터의 불길이 그의 피부 톤과 잘 어울렸다. 그러면서도 담배는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계속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니, 선우진이 조금 민망한 듯한 눈치로 담배를 하나 건넸 다.
“……피워 볼래요?”
예달이 여자였을 때는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었지만, 남자가 되었을 때는 그래도 사회적인 시선이 훨씬 그나마 낫지 않을까 싶어 하나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입에 쪽 문 채로 어디서 본 걸 따라해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아 담배를 잘근잘근 씹는 것밖에는 안 됐다. 시가가 아니라 얇은 타바코인데도 우왕좌왕 어쩔 줄 모르는 게 딱 예달다운 모습이었다.
선우진은 불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자신의 담배 끝을 예달의 것에다 맞닿게 하며 불을 내주었다. 그러고서는 한 번 빨아들여 봐요, 하며 예달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우응…….”
예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하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이윽고 빨아들이자 얼마 지나지 연기가 폴폴 피어오르면서 예달의 숨결에도 담배 결이 들었다. 하지만 예달은 갑작스럽게 숨이 매캐하게 막히는 느낌에 캑캑거리더니 이윽고 담배를 입에서 떼어내고 도련님, 하며 울상을 지었다.
“……안 맞으면 재떨이에다 버려요.”
“우읏, 네.”
생각보다 너무 맛이 썼다. 맛있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예달은 울적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흡연장 중심에 있는 재떨이에다 담배를 버렸다. 그러자 질 나쁜 남자 몇몇이 키들키들 웃으면서 담배 하나도 못 피우다니 바보 아니냐며 놀리는 투를 말했다. 예달은 움찔 떨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선우진의 옆에 꼭 붙어 서 있었다.
* * *
도박을 끝내고 나서는 함께 포커를 했던 사람들과 고급 요정에 가기로 했다. 도련님은 이런 곳에서 밥을 먹고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구나 싶어 신기한 마음이 끊이질 않았다. 예달은 생전 처음으로 와 보는 고급 요릿집, 특히나 예전에도 쉽게 먹지 못했던 중식 코스 요리를 이런 곳에서 먹게 되어 생경했다. 하지만 입맛에 맞는 것과는 별개로 양이 적어서 괜히 깨작거리면서 조금씩 먹고 있으니 선우진의 건너편에 있는 사내 하나가 술잔을 턱 건넸다. 그러나 예달이 생각하는 자그마한 정종과는 다르게 제법 커다란 유리잔에 술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에 예달이 어, 하고 웅얼거렸다.
“마셔 봐! 엉? 남자라면 이 정도는 마셔야지.”
“……예달 군, 마실 수 있겠어요?”
“마, 마실 수 있어요!”
예달이 호기롭게 말하면서 잔을 두 손으로 꼬옥 쥐자 주변에서 휘파람을 불어 대면서 마구 흥분했다. 남자라며, 고전적인 말을 해 대는 그들이었지만 심성 자체가 아주 나쁜 건 아닌 것 같았다. 예달에게 이게 맛있는 거라면서 계속해서 말을 붙여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달은 사내와, 사내들이 끼고 있는 여자들에게 여러 질문을 받아야 했다. 선우진은 예달과 와서 그런지 여자를 불러내지 않았지만 선우진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여자를 한둘은 꼭 옆에 끼고 있었기에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예달에게 오빠, 하며 일부러 귀엽게 부르는 여자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예달은 너무 예쁜 여자가 자신을 저렇게 애교 있게 부르는 데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그런 예달의 모습이 아무래도 귀여웠는지 다들 예달을 괴롭히기 바빴다.
“꼬마, 마지막 키스는 언제야?”
“그, 그런 건…… 비, 비밀이에요. 앗.”
사실 마지막 키스가 선우진이었기에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키스 이야기를 남들과 할 수 있을 리가! 예달이 화들짝 놀라서 대답을 회피하려고 하고 있으니 그제야 떠올랐다.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벌칙이라는 걸. 예달은 우으, 하고 울상을 지으며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남자가 킬킬 신나게 웃으면서 박장대소했다.
“비밀이라고 하면, 응? 우리 사이에서 섭섭하지! 마유미, 얼른 술을 가지고 와. 독한 걸로!”
그런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예달은 결국 술에 완전히 취해서 해롱해롱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취해서 자신의 옷과 선우진의 옷에 술을 엎지르기로도 모자라 오심을 느낄 지경이 되자, 선우진은 걱정이 된 나머지 중간부터는 자신이 흑기사를 자처해 술을 다 마셔 주었다. 과연 선우진이 생각하기에도 독한 술이었으니 예달에게는 당연히 부담스러웠을 테다.
살짝 취한 선우진과 완전히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예달은 선우진의 부축을 받고 기사가 운전하는 다임러에 탑승했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몸을, 어떻게 선우진은 이렇게 가벼이 들 수 있을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예달은 우으, 작게 웅얼거리며 눈을 가물가물하게 떴다가, 선우진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잠시 차려 보자 예달은 다락방에 돌아와 있었다. 저택 앞까지 돌아왔나 보다. 자신이 쓰는 다락방의 낮은 천장이 선우진에게 귀찮음을 안겨준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 몸을 숙여 주는 게 좋았다. 참 성격이 나쁘다고, 예달은 저도 모르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남자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이렇게 도련님 따라 도박장도 갈 수 있고.”
어차피, 도련님은 나 여자일 때도…… 여자로 안 봤으니까……. 예달은 들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고막을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난히 가련하게 느껴지는 음성이 오늘따라 슬프게 들렸다.
선우진은 예달에게 모진 짓을 한 것일까,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선우진은 이때까지 예달에게 해 준 게 어떤 일이었을지, 그녀에게는 어떤 감정을 선사했을지 뒤늦게 생각했다. 선우진은 침을 꿀떡 넘겼다가, 메마른 목을 축일 생각도 않고 그냥 다락방의 침대에 예달을 눕혔다. 예달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술 때문에 젖어 있는 예달의 옷을 벗겼다. 남자였으니 벗기는 데에도 거부감이 달리 들지 않았다.
“……예달 양.”
그게 많이 슬펐어요? 그렇게 말을 건네자 몸이 급하게 묵직해졌다. 술이 너무 독했던 탓이다. 무어라 대답을 기다렸던 말도 아니지만, 예달이 혹여나 깨어나기라도 할까 몇 분은 더 버텨 보려 했지만 더 이상 무리였다. 선우진은 그대로 자신의 옷도 대충 벗은 뒤에 곁에 함께 누웠다. 예달의 몸집은 남자가 되어도 별로 크지 않아 곁을 차지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자신이 건넨 다정함이, 부드러운 미소가, 그것을 넘은 작위적인 키스가…… 예달의 마음을 어떻게 뒤흔들었을까. 선우진은 잘 때까지도 그 생각을 미묘하게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작위적이었는지 스스로 알 수도 없어졌다.
* * *
아침에 일어난 예달은 다시 여자가 된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자각하고서는, 자신의 속옷이 여성 속옷이 아니라 남성 속옷이라는 게 당황스러웠다. 물론 갈아입지 않고 그 몸 그대로 잤으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그러나 자신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고 있는 손길이 느껴졌다.
“……도련님?”
뒤를 돌아보자 드로어즈만 입고 있는 도련님이 보였다. 그의 과거와는 반대되게 곱게 자란 인상을 주는 선우진은 달게 잠에 빠진 채 눈꺼풀을 짓눌러 감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를 감는 것으로도 모자라 완전히 끌어안고 제 품에 품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예달은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의 가슴을, 팔로 가렸다. 앙증맞은 가슴이 가새표로 가려지며 저택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