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 XX은 카멜리아에서
예달 양, 잘 잤나요? 간밤에 비가 좀 왔던데 방에 비가 들이치지는 않았고요?
점심때가 지나면 카멜리아로 와주면 좋겠어요. 대략 한 시에서 두 시 정도면 될 것 같네요. 사거리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그 카페예요. 우리 저번에 같이 다녀온 적 있죠? 예달 양이 쇼트 케이크를 세 개나 먹었던 거기요. 혹시 위치를 잊었을까 봐 약도라도 그려 놓으려고 했는데, 손재주가 좋질 않아서 이렇게 말로만 설명을 하게 되었어요. 이해해 줘요.
서재 책장 서랍장 가장 아래 칸에 보면 포장된 작은 상자가 있을 거예요. 파란색 리본이 둘린 거. 그거만 갖다 주면 되겠어요. 아 참, 바로 위 서랍을 열어 보면 흰색 봉투도 있을 거예요. 거기서 십 전 정도 챙겨서 같이 나와 주면 좋겠어요. 돈은 나한테 전달해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오거나 돌아가는 길에 예달 양이 좋아하는 간 식을 사 먹어도 좋아요. 뭘 사 먹을 건가요? 화과자?
아무튼 카멜리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잘 부탁해요.
-사이온지 유우야.
저택의 하루는 여느 때와 같았다. 예달은 언제나 그랬듯 새벽닭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서는 서둘러 유니폼을 입고 본관으로 뛰어갔다. 대충 두른 앞치마 주머니에서 쪽지가 바스락거렸다.
화관에서 양관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뛰다 그만 미끄러질 뻔했다. 그래도 마음이 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겨우 중심을 잡고 코너를 돌았다. 오늘은 일이 좀 많았다. 아침을 먹고 도련님 서재 청소를 한 다음에 심부름까지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저택에 온 뒤로 도련님 없이 혼자서 외출하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도련님이 쪽지에 적어 주신 대로 상자를 가지고 카페 카멜리아를 갔다가, 다녀오는 길엔 바바의 부탁대로 양장점에 들러 넥타이도 받아 올 생각이었다. 도련님이 간식을 사 먹으라며 용돈도 챙겨 주셨으니 함께 나눠 먹을 만한 디저트도 사 오면 좋겠다 싶었다. 예달은 먼지떨이를 들고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문득 생각했다. 귀가할 때 도련님과 함께 올 수 있을까? 기대가 됐다.
서재는 저택 일 층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게 도련님의 성격을 닮은 듯했다. 그가 일러 준 대로 서랍을 열어 보니 손바닥을 겨우 채울 만큼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파란 색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는 상자는 매우 가벼웠다. 예달은 상자를 살살 흔들어 봤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게 뭐지……?”
궁금했지만 함부로 열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달은 상자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일어 섰다. 카멜리아는 도련님이 언젠가 데리고 갔던 카페로, 그가 쪽지에 적었듯 예달 혼자서 케이크를 세 접시나 먹어 치운 곳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둘이서만 시간을 보낼 생각이신가? 예달이 볼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평일 낮이었지만 카멜리아는 만석이었다. 좌석 여기저기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고 낯선 음악이 차분하게 내부를 메웠다. 실내 흡연이라니,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딸랑 종소리를 뒤로하고 문을 닫았다. 예달이 천천히 카페를 둘러봤다.
도련님은 가게 구석에 앉아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머리카락이 통창을 투과한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고급스러운 원단의 셔츠는 반듯한 어깨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주름졌다.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예달은 그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정도는 당연했다. 매일 보는 모습이었으니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맞은편에 일행이 있었다. 연한 분홍빛 양장이 화사해 보였다. 미소 짓는 도톰한 붉은 입술이 인상적인, 상당한 미인이었다. 얇은 레이스 단장갑을 낀 그녀가 입가를 가리며 호호, 하고 살짝 웃었다. 예달과 눈이 마주쳤다. 인기척을 눈치 챈 듯 도련님도 뒤를 돌아보았다.
예달에겐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명치 안쪽이 찌르르 조여 왔다.
“아, 왔군요. 예달 양, 오는데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손바닥이 내밀어졌다. 크고 흰 손엔 굳은살 하나 박여 있지 않았다. 예달은 홀린 듯이 그 위에 제 손을 얹을 뻔했지만 겨우 정신을 붙들었다. 욕심나는 손이었다.
예달이 둘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앞치마 주머니를 뒤졌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꺼낸 작은 상자는 어디 하나 구겨진 데 없이 멀쩡했다. 사실 카페로 달려오는 길에 인력거와 크게 부딪힐 뻔했는데도 예달은 허둥지둥 몸을 피하면서도 앞치마를 먼저 끌어안았다.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작고 가벼운 상자였지만, 도련님께는 구겨지거나 부서진 데 없이 온전하게 가져다주고 싶었다.
“착한 아이네요. 멀리까지 와 주고.”
방긋 웃은 맞은편 여자는 예달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다. 차림새를 보고 바로 눈치 챈 모양이었다. 야속한 도련님도 따로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착한 친구예요.”
도련님은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달은 괜히 멋쩍어졌다. 고급스러운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둘은 꽤 가까운 사이인 듯했다. 예달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들 사이 분위기를 살폈다. 도련님을 힐끔거리며 생글생글 웃고는 있었지만 광대가 파들파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직 낯선 양단화를 신고 뛰느라 발이 놀랐는지 신발 앞코에 계속 부딪혔던 엄지발가락이 얼얼해지기 시작했다.
“도련님, 저 디저트 좀 사서 들어가려고 하는데요... 혹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알아서 먹고 갈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도련님은 예달을 올려다보며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예달은 그 미소에서 어렴풋이 거리감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주인의 말에 대꾸 없이 머리만 주억거리다니, 보통의 주인이었다면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엄히 혼낼 일이었다. 손님도 지적할 만한 일이었지만 고맙게도 여자는 딱히 말을 얹지 않았다.
등 뒤에서 조곤조곤 대화가 이어졌다. 예달은 사이즈가 잘 맞지 않는 단화 뒤축을 반쯤 끌며 카페를 나왔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련님은 다정했고 예달은 언제나 그랬듯 그의 등만 돌아볼 뿐이었다.
예달이 씩씩하게 사거리를 건너갔다. 이번엔 인력거나 자전거에 부딪히지 않게 양쪽을 꼼꼼히 살피는 여유까지도 보였다. 단화 뒤축이 헐떡거렸지만 예달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 감정은 익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