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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두 사람의 밤

푸딩챤 2025. 9. 20. 08:59

밭은 숨결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누가 보아도 위독할 만큼 핏자국을 흘려대는 사내는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있었다. 선득한 핏자국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를 따라온 궤적은 지독할 만큼 그를 따라다니고는 했다. 갈수록 지쳤는지 핏자국의 간격은 점점 좁아지고 흐드러지게 뭉텅이로 피어 있다. 웅덩이가 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할 만큼 안쓰러워 보이는 혈흔이 두렵게 따라다니고, 순사라는 이름의 승냥이 떼가 몰려 들지 않도록 숨을 숨기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키가 크고 날렵한 자신의 몸은 발가벗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그 한마디로 자신을 속이면서 어떻게든 피했다. 복면을 쓰고 있어 숨도 제대로 내쉴 수 없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탈 듯한 갈망과 함께 갈증이 올라왔다. 이렇게 피를 줄줄 흘리면서 체내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걸 느낄 때마다 갈망을 느낀다. 욕망을 느낀다. 자유를 꿈꾼다. 미친 듯이 찾아 헤매다 못해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몽유병 환자처럼 떠도는 망령.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병이 아니었다. 자연스 러운 과정이며 연어 따위가 자신의 길을 찾아서 역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꾸로 거스르는 듯 보이지만 그게 모든 순리라는 것이다. 선우진은 그렇게 자신의 길을 정의했다.

걷고 또 걸으니 달빛이 아름다웠다. 승냥이 한 마리에게 칼을 맞아 환부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연은 자신을 관망하기만 한다. 그렇지만 그게 원망스럽지는 않다. 자연이 놈들에게 일조했다면 그마저도 분한 마음이 들어서 살아가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자신의 성격을 안다. 자연에게까지 본성을 숨기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비틀거리면서 겨우 집 마당까지 왔다. 집이 멀게만 느껴졌는데 자신을 세뇌하고 또 다른 생각도 하면서 환부를 충분하게 지혈하다 보니 손바닥만 흥건하게 적실 정도로 피가 멎었다. 다행히도 바닥에 흐르지 않았다. 혹여나 수사를 당해도 혈흔이 남아 있지 않으니 이것으로 모든 건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며 몸을 옮겼다.

 

한편, 예달은 오랫동안 귀가하지 않고 오는 선우진을 기다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걱정을 하느라 바빴다. 도련님이 어디서 나쁜 일을 당하셨으면 어떡하지, 도련님이 일본 순사에게 시비가 붙으면 어쩌지, 요즘 시대에는 길거리에 나돌기만 해도 분위기가 흉흉할 텐데, 술집에서 어떤 질 나쁜 놈이 도련님의 얼굴을 보고 질투라도 하면 어쩌지……. 온갖 나쁜 생각이 마구 이어졌다. 결국 생각 속에서 선우진은 괴한과 싸우다가 그 잘생긴 얼굴에 생채기를 내면서 살짝 절뚝거리며 돌아오고 있었다. 안 돼!

그리하여 예달은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서 옷까지 갈아입고, 쌀쌀한 밤중에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도 외투를 챙기지 않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게 참 그녀다운 일이었다. 칠칠치 못한 모습에 선우진이 자신을 부드럽게 그르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달은 자그마한 손가락이 새빨갛게 얼어 붙어 꽃을 피운 걸 보다가, 손을 모으고 호호 불었다. 이렇게 있으니 호빵이 먹고 싶어졌다. 여기에는 없는 음식이라 그리워해 봤자지만, 언젠가 도련님과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으읏…….”

저 멀리서 검은 인영이 보였다. 그런데 도련님이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온통 검은 복장을 뒤집어 쓴 사내였다. 언뜻 봐도 위험한 분위기가 풍기는 사람이 느긋하게 천천히 경계를 세우면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몸이 발발 떨렸다. 아무리 봐도 위험한 자 같았다. 좋게 쳐줘야 강도였고, 나쁘게 치면 엄청난 범죄자일 듯 했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사지가 굳어 어쩔 줄 모르고 도련님, 도련님, 하고 웅얼거리고 있으니 굳어 있던 입이 그제야 풀렸다. 으으, 벌벌 떨던 예달이 소리를 지르려던 때였다.

“도려, 흡……!”

“……쉿.”

빠른 속도로 예달을 덮쳐 그녀를 뒤에서 껴안고 입을 콱 막아버린 사내가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혹여나 저택의 감시에 걸리지 않도록 예달을 벽에 천천히 몰아붙이자 그 와중에도 예달은 흥분해 흐읍, 읍, 하고 소리를 내려고 했다. 그러나 입을 감싸는 힘이 더 강해지자 예달은 그저 겁만 집어먹고 가만히 있었다. 예달을 해치지 않으려 하는 행동이었는데 그녀에게는 오히려 강한 압박처럼 보였는지 예달은 갈수록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던 사내, 선우진은 아주 얕게 숨을 폭 내쉬었다. 이상하게 예달은 그 숨결에 안도하고 말았다. 이상했다.

“저는 강도도, 아가씨를 해치려는 것도 아닙니다. 한 번만 못 본 척…… 넘어가 주실 수 없겠습니까?” 

유창한 조선어였다. 조금 예의 바르지만 단정적인 어조가 선우진과는 은근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목소리도 다르게 느껴졌다. 패닉 상태라 오히려 더 다르게 느껴진 것도 있었다. 두툼한 목이 내는 낮은 목소리와 비로소 낯설게 느껴지는 조선어에 예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끔뻑거렸다. 게다가 선우진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존댓말을 쓸 만한 위치의 사람이 아니니까. 예달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품에 있던 힘이 풀렸다. 그가 일부러 놓아준 것인가 싶어 감동을 받기도 잠시, 알고 보니 그는 과다출혈로 추정되는 원인 때문에 휘청거리고 만 것이다.

“이, 게…… 어, 어디서 다치신, 아니, 이럴 때가…….”

“으윽……, 피가…….”

한숨을 신음처럼 내뱉고 있으니 그가 고통에 몸서리치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결국 같은 씨족이고 자신의 조상이라 생각하니 사내가 말한 대로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는지 결국 예달은 그를 질질 끌고 왔다. 들쳐 멘답시고 열심히 어깨에 팔을 두르게 하기는 했지만 그러기에는 역부족이고, 다리 길이도 차이가 나서 질질 끌리기 일쑤였다. 예달은 혹시나 누가 보고 있지는 않을까, 도련님이 오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일단 다친 위험한 사람을 얼른 치료했다. 같은 조선인이었으니까.

 

안으로 들어와 예달의 방 의자에 앉히고 얼른 소독약과 붕대를 가지고 왔다. 그 사이 사내는 자신의 환부를 확인하기 위해 찢어진 상처를 감싸고 있는 옷을 살짝 찢어버린 상태였다. 사내가 일어서서 반항이라도 하면 어쩌나 했던 예달이었는데 그가 솔선수범하여 그렇게 보인 데에 안도를 느꼈다. 자신이 작고 마른 여자라서 만만하게 보였나 보다, 하고 안심하면서 붕대와 소독약 그리고 약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혹시 얼굴도 다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복면을 벗기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검은색 손길이 예달을 꽉 붙잡았다.

“흐, 흐으.”

화들짝 놀란 그녀가 벌벌 떨면서 손을 팍 치웠다. 그러고는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피도 무섭고 사내도 무서웠다.

“내 얼굴을 보면, 그때는 이 일만으로는 그치지 않을 겁니다.”

“…….”

조선인, 한밤중의 검은 옷. 아무리 봐도 위험한 사람 같았다. 조선어를 쓰는 것부터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피칠갑을 했다니……. 분명히,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예달은 낡고 닳은 대한민국 국기를 떠올렸다.

“감당할 만한 용기가 있습니까?”

낮은 목소리가 자신의 저변을 긁는 듯했다. 예달의 연약함을 지적하면서도 걱정하는 듯한 말투는 왜인지 낯설지 않았다. 예달은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고 애써 고개를 저었다. 잘게 젓고는 알았어요, 알았어요, 하고 발발 떨리는 손길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종이에 베이기만 해도 손이 너무 아픈데 이렇게 심한 상처라니. 너무 충격적이고 무서워서 손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그렇지만 눈을 질끈 감으면서 상처를 어떻게든 건드리고 있으니 사내는 조금 흐뭇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감한 아가씨네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분위기가 조금 닮으셔서요. 그래서,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싱긋 웃으면서 엷게 말하는 모습에 예달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닮았다고 착각해서,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그를 자연스럽게 도와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그 피가 범벅인 허벅지를 직접 닦아낸 것까지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는데 굳이 해준 것을 보면 예달은 그에게 은근한 끌림을 느꼈다고 여겼다.

그렇게 사내는 밤바람처럼 왔다가 떠나갔고, 예달은 긴장감 어린 얼굴로 선우진을 재차 기다리다가 지쳐 잠들고 말았다.

 

이튿날, 불청객이 찾아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불청객은 일본인 순사였다. 그가 말하기를, 이 저택 근처에서 범죄자로 보이는 수상한 자를 목격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수색해 보아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저택에 신분증과 제복 하나로 쳐들어오게 된 순사를, 예달은 홀로 맞이해야 했다. 겁을 먹어 오들오들 총칼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떨고 있는데, 순사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혹시 그쪽이 숨겨준 것 아니오?”

“네?!”

화들짝 놀라 울음까지 터뜨리려고 하자 이 여자가 제 발로 걸려 들었구나, 하는 얼굴로 순사가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 정말로 모르는 게 맞냐고, 이제 보니 좀 조선인처럼 생긴 것 같은데 가서 조사를 받는 게 좋겠다며 위험한 분위기의 발언을 계속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가운데 사이온지가 눈을 가물가물하게 뜬 채 바깥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냐고 부하에게 묻더니 자초지종을 듣고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즐거운 밤을 보내고 달콤한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타카미츠 순사가 왔군.”

“……안녕하십니까.”

한참 실적을 올리기 딱 좋아 보이는 여인만 혼자 있는 줄 알아서 들떠 있던 타카미츠였는데, 불운하게도 저택의 주인이 깨어 버렸다. 젠장할,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으니 사이온지가 말했다.

“귀찮으니 본론부터 말하지. 예달 양은 어젯밤 내내 함께 있었네.”

“…….”

“즐겁고 황홀한 밤을 보냈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예달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에 입을 쪽 맞추어 주었다. 타카미츠는 이번에도 허탕이라는 듯 에잇, 하고 일어나서는 ‘결례를 끼쳤습니다’ 하는 한 마디만 남긴 채 떠나버렸다. 불쾌한 듯 입술을 삐죽거리는 모습인 타카미츠의 뒷모습을 보고서는 선우진이 방긋 웃었다.

 

“불청객이 떠나갔군요.” 

“……은근히 거짓말 정말 잘하시네요.”

예달은 왠지 뺨이 달아오른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볼을 슥슥 문질렀다. 느낌이 이상했다. 좋은데, 기묘하고, 또 좋았다. 따끈따끈하고 뜨거운 느낌. 이제 이런 것에 착각하지 않을 때가 되었지만 언제나 착각하고 말 것처럼 휘청이는 마음을 가진 자신이 조금 바보 같다. 예달이 새침하게 대답하니 선우진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거짓말이라니, 하고 능청을 떨었다. 그러고는 ‘임기응변’이라고 하는 거라며 자리를 유유히 떠나갔다. 

‘거짓말 아닌데.’

선우진은 그렇게 벙찐 예달을 바라보면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아침 식사를 권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잠옷 안으로는 붕대가 엉망진창으로 감겨 있었다. 그럼에도 선우진은 그걸 풀지 않고 하룻밤을 보냈다. 평화로운 이튿날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