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달은 일어나자마자 느껴지는 기묘한 것에 자신의 성별을 깨달았다. 꿈인가 싶었는데 정말로 성별이 바뀌어 버렸다. 화들짝 놀란 그녀, 아니, 그가 제대로 옷도 갖추어 입지 않고 후다닥 뛰쳐 나갔다. 남자가 된다고 해서 말괄량이 같은 성격이 고쳐지지는 않았다.
“도련님! 도련니임!”
거실로 발을 구르면서 뛰쳐나가자 가운을 대충 걸치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가슴팍을 훤히 드러내고 기다랗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모습이 조금 자극적이었다. 예달은 얼굴을 붉히며 그 여인이 들고 있는 커피 향기를 맡았다. 혹시……?
“도련님이라니. 아가씨라고 해야지, 예달 군.”
“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면서 보이는 미소가 선우진의 것과 너무도 닮았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도, 여자치고는 큰 키도, 늘씬하게 뻗은 다리도 선우진이 여자가 된다면 꼭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예달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남자가 되었고 선우진은 여자의 모습이다. 그럼…… 아하, 반대인 거구나. 그렇게 속으로 꿍얼꿍얼 말하고 있으니 선우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예달은 얼른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집사들이 입을 것 같은 정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색했으나 몸에 딱 맞는 게 느껴져서 착용감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자 향수 냄새가 두드러졌다. 단정하고 예쁘지만 화려한 멋이 있는 화장을 하고, 서양식 원피스에 장갑과 모자까지 착용한 모습이 몹시 아름다웠다. 선선하게 느껴지는 향수는 코를 톡 짓이길 듯이 똑 부러지는 향기였다. 그러나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감화되는 느낌이었다.

“그럼, 다녀 올게.”
“네, 네, 아, 아가씨.”
입에 붙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선우진은 덩치가 큰 경호원들과 함께 사라졌다. 사업을 위해 결성된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서 나가는 듯했다. 사이온지가 그렇게 자리를 비우자마자 예달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결심했다.
‘여기서는 꼭 주인님께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테야.’
그릇도 안 깨고, 귀찮게 줄줄 따라다니지도 않고, 할 일을 제대로 해내고, 그리고 위험할 때는 아가씨를 꼭 한 몸 바쳐 지키는 시종이 되자. 남자가 되었으니 전보다 힘도 세고 키도 커졌다. 그러니 분명히 조금이라도 도움이 더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이온지 아가씨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지키겠어! 예달은 사이온지 아가씨와 같은 171cm 의 신장을 가지고, 남자치고는 꽤 가녀린 팔목을 하고 그렇게 굳건히 결심했다.
별개로 안심이 되는 게 하나 있었는데, 예달은 선우진이 여자와 밤거리를 다니며 놀러 다니는 게 내심 걱정이 되고는 했다. 아무리 남자라도 늦게 다니면 위험한 세상이었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여자가 되셨으니까 여자와 밤놀이를 하느라 늦게 돌아오진 않으시겠지.
‘늦게 오실 때마다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은 없겠다.’
뿌듯하고 기쁜 마음을 담아 배시시 웃었다.
그러나 사이온지 아가씨는 오후 10시가 넘어도 오지 않았다. 경호원들 또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문앞에서 뭐 마려운 개처럼 뽈뽈 기어다니고 있던 때였다. 11시가 되어서야 사이온지는 다른 여자의 향수 냄새를 폴폴 묻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뺨과 목덜미에는 루주 자국을 줄줄 달고 있었다. 제각각 다른 색깔의 립스틱이 현란하게 묻어 있는 모습을 본 예달은 아연했다.
“도, 아, 아니, 아가씨……! 밤거리는 위험하니 집에 일찍 들어오시면 안 돼요?”
그녀가 겉옷부터 건네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받아들기는 했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예달이 졸졸 쫓아다니며 그리 말하자 사이온지가 뒤를 돌아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려 유혹적으로 웃었다.
“왜, 다른 여자 흔적 묻혀 오니까 질투라도 나요?”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아가씨가 걱정이 되어서……!”
“으응, 알았어요. 조심할게.”
건성으로 대답하는 모습으로 보아 내일도 모레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예달은 으으, 하고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와인처럼 어른스럽고 달콤한 목소리를 잊지 못해 뺨을 붉혔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예상대로 선우진은 11시가 넘은 시간에도 오지 않았다. 어제는 11시라서 늦다 생각했는데 어제가 양반이라니. 예달이 불안해졌다. 결국 날이 바뀌어 자정이 넘은 상황이 되자 예달은 끝도 없이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결국 부엌으로 달려간 그는 식칼도 도마도 아닌 프라이팬을 들었다. 겁이 많은 예달에게 있어 프라이팬은 최적의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달은 선우진이 가겠다고 했던 곳으로 후다닥 이동했다. 밤이 깊어서 길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천방지축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이런 마음으로 말이다. 겁을 먹은 중에도 길눈을 밝혀 찾자 그 노력에 신이 감동했는지 사이온지 아가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앗…… 아가, 아가씨!”
그리고 주변에 최소 조직 폭력배에서 한 자리는 할 것 같은 큰 덩치가 여럿 모여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예달은 얼른 뒤에서 제일 키가 그나마 작아 보이는 놈의 대가리를 확 후렸다. 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선우진이 뒤를 돌았다. 뒤에 누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냥 갈 줄 알았지 설마 그걸로 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황당하다는 눈치로 바라보니…….
“예달 군?”
더욱 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예달이 손을 뻗어 아가씨, 하고 다급하게 말하며 그녀를 이끌었다. 정신없이 내달리자 또각또각 다급하게 구두 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한참 달려 구석에 버려진 캐비닛이 보였다. 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그녀에게 제 재킷을 입혀 주고 자신이 먼저 들어간 뒤 사이온지를 안으로 들였다. 그녀의 원피스가 더럽게 물들지 않도록 조처를 취하는 게 꽤나 집사 같았다.
사이온지는 제법이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예달을 바라보았다. 제법 큰 캐비닛이라 성인 남녀 둘이 들어가도 조금 낄 뿐 별로 문제는 없었다. 구멍도 나 있어서 거리도 관망할 수 있어 도피처로는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키가 비슷하다 못해 거의 같은 탓일까, 단순히 몸이 딱 붙어 있어서 그런 것일까 달콤한 향이 온몸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숨결을 내뱉을 때마다 뜨겁게 울리는 소리와 판판한 가슴에 눌리는 통통한 가슴을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얼굴이 마구 화끈거렸다.
예달은 큼, 하고 얕게 헛기침을 하면서 괜히 바깥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휑했다. 분명히 쫓아오고 있는 것 같았던 남자들은 아마도 길을 잃어서 찾지 못했는지 따라오는 흔적조차 없었다. 다행이었다. 예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캐비닛을 열었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을 맞자 오늘따라 너무 반가웠다. 이윽고 예달은 프라이팬을 꾹 고쳐 쥐면서 말문을 조용히 터뜨렸다.
“그러니까 제가 밤 늦게 돌아다니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가씨. 그러면 안 돼요. 나쁜 불량배들한테 시비나 걸리고…… 그 사람들, 길거리 양아치 맞죠? 딱 봐도 그런 사람들 같았어요. 아가씨가 예쁘고 덩치도 그 사람들에 비해서 크지 않으니까 아가씨를 인질로 잡아서 뭐라도 뜯어내려고 한 거라고요!”
걱정되는 마음에 반쯤 화를 내면서 씩씩거렸다. 그러면서도 선우진에게 무언가를 계속해서 물어 보았다. 여기는 괜찮냐, 저기는 괜찮냐, 기분은 좀 낫냐, 어떤 일이 있었냐, 놈들이 무슨 말이라도 했냐, 주절주절 계속 이어지는 질문을 듣고 있는데도 선우진은 달리 대답하지 않고 그저 예달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내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아가씨, 정말로 괜찮으세요?’ 라며 묻는 예달을 향해 냅다 입맞춤을 선사했다. 쭈웁-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아랫입술을 빨아들이자 예달이 온몸을 굳혔다. 쨍- 프라이팬이 바닥에 떨어져서 데구루루 굴렀다. 몇 번 입안을 헤집고 나서는 선우진이 입술을 뗐다.
“으우……, 아, 아가, 씨. 그래서, 그러니까, 아까 그…….”
질문까지 까먹었다. 그가 계속 웅얼웅얼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하고 당황하고 있자 사이온지가 다가왔다. 뺨을 보드랍게 쓰다듬으며 말해 주는 목소리가 몹시 곱고 차분했다. 아무런 험한 일도 당하지 않았다는 듯한 음성이라 예달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콩콩 뛰는 걸 느꼈다.
“나는 괜찮고, 괜찮을 거예요. 예달 군이 나를 지켜줄 거잖아, 오늘처럼.”
그 무리들은 어차피 선우진 휘하에 있는 놈들이었으므로 문제가 될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제 주인의 그런 어두운 면모를 모르는 이상 예달은 오해할 수밖에 없었겠지. 선우진은 다시 한 번 이렇게 여린 제 시종을 끝까지 속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싱긋 웃는 모습에 예달은 올망졸망한 눈동자를 빛내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감동을 받은 듯 촉촉한 눈동자에는 희망이 가득했다.
* * *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고 다시 아침이 찾아왔다. 예달은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가슴부터 은근히 콕콕 두드렸다. 작은 가슴이라서 남의 눈에는 존재감이 없어 보이겠지만 그걸 만지고 달고 있는 예달은 알 수 있었다. 봉긋 솟아 있었다! 예달은 자신이 다시 여자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꿈이었나 봐.”
그렇게 즐거운 얼굴로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꿈에 특별 출연해 준 선우진에게 다가가 말했다. 성별이 바뀌었다는 것은 선우진에게 실례가 될 수 있으니 말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선우진을 위하여 매우 큰 결심을 했고 그를 구하기 위해 새벽에 나가서 선우진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멋지게 구해냈다는 건 강조해서 말했다.
“제가 꿈속에서 도련님을 구했어요!”
수줍게 쫑알쫑알 말하는 그녀는 정말로 기뻐 보였다. 선우진은 무슨 내용인지 종잡을 수 없었기에-다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상태였기에 예달에게 진짜로 도움을 받을 상황인지 궁금했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서 커피 잔을 내려놓고 박수까지 쳐 주었다.
“와아, 고마워요. 예달 양. 참 잘했어요.”
그렇게 싱긋 웃으면서 그녀에게 포상 같은 미소를 선물로 주었다. 예달은 의기양양하고 기쁜 얼굴로 ‘앞으로도 도련님을 잘 지켜 드릴게요’ 라고 충성심 어린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