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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영혼 체인지

푸딩챤 2025. 9. 20. 08:54

 

아침 일찍 일어난 예달에게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다. 좋은 소식은 짝사랑하던 도련님을 드디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가지게 된 나머지 자신이 도련님의 몸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세상에…….’ 

자신의 몸에는 아마도 사이온지 도련님이 들어가 있을 거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지만, 일단 가장 문제인 건 자신이 도련님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이겠지. 그는 하는 일이 많다. 사업도 많이 하고 있는 데다가 늘 교류하는 귀족도 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그의 사정을 소상하게 모른다. 즉, 대역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생전 아플 일이 없어 보이는 튼튼한 도련님이라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양심에 찔렸지만, 자신이 나가서 마음대로 날뛰어 폐를 끼치는 건 더욱 양심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감기 몸살부터 근육통에 기침까지 있다고 부하에게 말하자 덩치 큰 부하는 떨떠름한 눈길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부터 예달은 선우진의 몸으로 칩거할 예정이었다. 혹여나 꿈일까 싶어 한 번 더 자고 일어나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예달은 선우진의 얼굴을 한 채 울지는 않고 코를 훌쩍거렸다. 걱정이 밀려온 탓이다. 물론 아침 식사 시간에 자신의 몸에 들어간 선우진과 만나기도 했지만……. 그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다. 

“달리 대책은 보이지 않는군요, 예달 ㅇ, 아니, 도련님.” 

분명히 자신의 얼굴이 웃고 있는 것인데 너무도 다르게 보여서,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그렇게 낯선 얼굴의 자신을 보자 재차 심란해졌다. 예달은 자신을 향해 도련님이라 부르는 선우진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둘이서 있을 때는 편하게 하시면 안 될까요……?” 

“음, 글쎄.” 

그는 단 둘이 있을 때도 표면상 관계를 유지해야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듯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이 우스운 상황이 제법 흥미로운 눈치였다. 반면 예달은 하급자로서 심장이 계속 두근 거리고 조마조마했다. 들키는 건 당연히 문제가 맞았지만 그가 자신에게 도련님이라고 하다니! 

 

“내 얼굴로 그렇게 애원하고 있는 예달 양을 보니 참 기분이 야릇한걸.” 

“도련니임…….” 

울먹거리는 선우진의 탈을 쓴 예달이 입술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자 선우진이 픽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가씨라 할까.” 

“아니, 아니어요. 그냥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알겠습니다. 도련님.” 

많은 업무에서 해방되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몸이 바뀐 게 신기해서 그런 것인지 예달의 얼굴을 한 선우진은 퍽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러곤 하루만 더 버텨 보자고 이야기하며 유유히 떠나갔다. 

 

이러나 저러나 시간이 흘러 저녁 시간이 되었다. 즉, 씻을 시간이 당도한 것이다. 하지만 예달은 선우진의 나신을 도무지 볼 자신이 없어서 계속 조마조마했다. 

“……예달 양, 안 보이죠?” 

“네, 네에.” 

그래서 결국 선우진의 힘을 빌렸다. 선우진의 넥타이로 눈을 꼼꼼하게 가리자 다행히도 몸이 보이지 않았고, 예달은 그 틈을 타 선우진에게 몸을 맡겨 이 몸을 씻기기로 결정했다. 아무튼 씻지 않는 건 이 몸에도 폐인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모양새가 좀 이상했다. 넥타이를 묶어 시야를 가린 도련님을 씻겨 주는 메이드라니. 그러나 이게 최선이었기에 예달은 함부로 거절하지도 못했다. 

“아프지는 않으세요? 도련님.”

“괜찮아요, 도련님.” 

선우진이 먼저 예달에게 한 번 물어본 뒤 타올로 매끄러운 피부를 살살 닦아내자, 예달은 자신이 도련님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도 잊고 버릇처럼 끄덕였다. 그러자 놀리듯 선우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깃들었다. 

“으응. 알았어요, 사이온지 도련님.” 

자신의 몸을 향해 ‘사이온지 도련님’이라고 말하자 뺨이 발그레했다. 예달 양은 참 부끄럼이 많아. 그가 웃음을 참으면서 몸을 닦아주자 예달은 간지럽게 감겨 드는 손길을 꿋꿋하게 이겨냈다. 우여곡절이 길었지만 어쨌든 다 씻고 나자 그래도 뿌듯함이 들었다. 몸이 뽀송뽀송해지니 기분도 좋았고, 도련님에게서 평소에 나는 냄새가 자신의 몸에서 난다고 생각하니 기분도 들떴다.

 

* * * 

 

목욕 가운을 칭칭 두르고 개운한 몸으로 나오자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집무실에 자연스럽게 앉은 제 몸을 보자 기분이 야릇했다. 예달은 목욕 가운을 한 번 더 꼼꼼하게 여미고, 집무실 책상에서 예의 그 만년필을 들고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선우진에게 다가갔다. 그는 일에 열중하고 있어 예달에게 달리 시선이나 말을 건네지 않았다. 

‘도련님도 열심히 하고 계신데, 나도 뭔가 해야지.’

자신은 심지어 도련님의 손길에 씻기기까지 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죄송한 일인데 도련님은 아무런 내색 않으시고 일을 하고 계시다니. 아무리 몸이 바뀌었어도 주인과 메이드 관계는 변치 않는다. 예달은 얼른 종종걸음으로 집무실 내 창가로 가서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그리고 삐이- 하는 귀여운 소리가 울릴 때쯤 쏜살같이 튀어 갔다. 

 

한편 선우진은 그 강아지 같은 모습을 한 자신을 보고는 ‘꽤 색다른 광경인데’ 하고 흥미로워했다. 하루 쯤은 이렇게 몸이 바뀌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이 일이 길어진다면 그때는 어찌 하면 좋을까. 선우진도 사실 아무렇지 않게 예달의 몸에 들어와 있는 듯했지만 그가 워낙 늘 여유로운 연기를 하고 있어 몸에 밴 것뿐이지, 정말로 마지막까지 예달의 몸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고민할 거리가 많다고 여겼다. 아무래도 몸이 바뀐 것이니까. 

그나저나 참으로 작고 귀여운 몸이다. 체구가 조그맣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지만 걸을 때마다 몸이 팔랑 거리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자신보다 길고 좀 더 풍성한 스타일이라 귀를 덮는 게 조금 거슬리나 싶었는데 이것도 꽤 마음에 들었다. 시야가 낮아진 데다가 왠지 손재주가 낮아진 듯한 기분이 들지만-이유 모르게 종이를 넘기는 게 잘 되지 않았다, 아마 예달의 몸이 타고난 손재주 영향인 듯했다- 체험으로는 즐거운 일이었다. 

 

“도련님, 커피를 타 왔어요. 드시면서 하세요.” 

그렇게 잠시 숨을 돌리며 예달의 몸에 대해 생각할 때였다. 자신의 얼굴을 한 예달이 목제 쟁반에 커피 한 잔을 타서 왔다. 기분에 따라 맞추어 먹을 수 있도록 크림과 설탕, 그리고 가볍게 먹을 수 있는 크래커도 함께 있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 

예달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주인님이라는 말이 어색했다.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는 ‘주인님’ 이 단어는 조금 낯설고, 때에 따라서는 굴욕적인 단어라 그런 것일까. 애초에 선우진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이상 익숙한 것도 이상했다. 

“알았어. 고마워요.” 

엷게 웃으며 그녀가 건네는 커피를 받았다. 그렇게 안심해서 방긋 웃고 있는 예달이 사이온지가 커피 마시는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청각이 뛰어나고 워낙 기민한 선우진은 바깥에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면서 시선을 날카롭게 고정하는 게 과연 선우진의 눈빛이었다. 

 

“사이온지 군, 있나?” 

똑똑, 하는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불청객이 광경한 것은 책상에 앉아 보란듯이 서류를 읽고 있는 당당한 분홍머리 메이드와, 옆 에서 손수 커피를 타 주며 쟁반까지 계속 들고 있는 귀족 사이온지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분홍머리 메이드 쪽은 표정도 새침했다. 아무리 봐도 태도만 보면 주종관계가 반대인 듯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메이드인지, 옷만으로 구별되는 게 아니었다. 불청객은 혼란스러운 광경에 눈을 끔뻑였다. 사이온지 군이 있기는 있는데 어째 이상……했다. 

예달은 그 모습을 들키자마자 손을 파르르 떨었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쟁반이 달달달 떨릴 정도였다. 선우진은 혹시나 자신의 모습으로 그릇을 또 깰까 싶어 그녀의 손에서 쟁반을 빼냈다. 자연스럽고 잽싸게 빼내도 예달의 긴장은 풀릴 줄을 몰랐다. 

예달도 알고 있었다. 사이온지가 저렇게 평범하게 생긴 여자를, 그것도 메이드로, 심지어 매일 접시도 깨먹는다는 저런 조그마한 여자애를 메이드로 데리고 있는 게 수상하다는 뜬소문이 돈다는 것을. 곱게 자란 온실 속 화초 같은 사이온지 유우야였으니 그 메이드가 분명히 그의 사업을 뒤에서 조종하는 엄청난 계략가인 게 틀림없다고, 사이온지의 사업과 자본 확장에 큰 역할을 하는 건 그 비선실세 여자이리라고 헛소문까지 퍼지는 중이었다. 예달을 실제로 만나서 대화한 적 없는 사람들의 망상이 더해지고 또 더해져 예달은 순식간에 ‘사이온지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희대의 악질 지략가’가 되어 있었다. 

 

선우진은 그 불안한 기류를 알아채고, 자신의 손에 있던 커피를 냅다 던져버렸다. 쨍그랑! 예달은 앙칼지고 무서운 손길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커피는 이렇게 타는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요. 일을 제대로 못 했으니, 벌을 받아야겠군요.” 

생전 자신이 낼 수 있는 목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만큼 냉정한 음성이었다. 예달이 흠칫 놀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선우진은 도도하고 당당했다. 

“주, 주인님. 대체, 무슨…… 우으, 읏.” 

그 순간 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까치발을 들고 입을 맞추었다. 쭈웁, 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리도록 아랫입술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혀의 흐름이 보일 정도로 대놓고 붉고 통통한 혀를 들이밀자 일순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시야가 바뀌었다. 돌아가는 조건이 키스였던 듯했다. 동화 같은 일이었다. 

선우진은 다시 자신이 원하는 시야로 돌아온 데에 만족하며 잠시 눈동자를 내렸다. 예달은 바보 같은 얼굴로 뺨을 시뻘겋게 붉힌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숨을 쉴 법을 잘 몰라서 뺨도 부루퉁해져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을 다정하게 헤집은 뒤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불청객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듯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밖에 사람이 있었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주인님’과 한창 즐기는 중이니 이만 돌아가주지 않겠나.” 

 

단호한 축객령에 불청객은 ‘어, 어어’ 하고 웅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기묘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돌려서는 중얼거렸다. 사이온지 군의 성적 취향은 아무래도 좀 특이한 것 같군. 근래 조선 내 화족 동인(同人) 모임에서 사이온지가 별 볼 일 없는 메이드를 고용했다고 해서 제법 왁자지껄했는데 -사이온지는 단연 출신을 가리지 않고 현재 조선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이라면 예의주시하고 있는 사내였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귀족치곤 사업 수완이 범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뜬소문의 실체는 이런 거였나. 

‘하긴, 녀석이 그럴 리가 없지.’ 

늘 곁에 있는 여자가 바뀌고, 당당하게 보이던 사이온지가 저택에서는 이렇게 수상한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니. 그저 은밀한 성적 취향이 너무 의외인 나머지 오해가 겹쳐져서 생긴 사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모습이 너무 신경 쓰여서, 불청객은 일부러 천천히 문을 닫았다. 남의 성생활을 엿보는 취미는 없지만 그 사이온지였으니 한 번쯤 눈길이 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느긋하게 닫히는 묵직한 문 너머로는 선우진이 그 메이드를 여봐란듯이 고귀하게 모시고 침대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마저 벌을 주셔야지요, 주인님.” 

아까 말했던 것보다 더 온기가 어린 목소리였다. 불청객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리가 단절되었다. 

 

관계의 실체(?)를 눈앞에서 직접 목격한 불청객이 후다닥 복도를 달려 나가고 있을 즈음, 안에서는 상황 정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선우진은 밀착했던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손을 조심스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을 넘기기 전에 모든 게 해결되어 다행이군요.” 

다시 집무실 책상으로 다가가자 엎질러진 커피가 보였다. 이런. 그는 아까 키스한 것보다 커피를 바닥에 흘리고 유리잔을 하나 깬 게 조금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게 문제가 아니, 아니고, 지금 도, 도련님 평판이, 그리고, 아까 보인, 주인님이라고 하셨던 것 때문 에, 그, 성, 성적 취햐앙……이, 아니, 아니지. 그런 것은 다 차치하고도, 애초에, 저, 저 같은 거랑 키…… 스를 두 번이나 해도 정말, 정말로 괜찮으신지……! 아무렇지 않게 문제가, 모, 모두 해결되었다고 하시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련님이 괜한 오해, 흐으, 오해를 사시는 건 아닐까요……!” 

예달은 얼굴을 붉히고 선우진을 졸졸 따라다니며 마구 말했다. 문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데다가 말도 횡설수설 더듬고 있어 말이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선우진은 그녀가 하는 걱정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꽤 오래 지내자 예달어(語)-예달이 당황할 때 알아듣기 어렵게 말하는 것-를 통역하는 데에도 상당한 능력이 생겼다. 

“내 평판은 겨우 이런 것으로 떨어지지 않으니 안심하도록 해요.” 

정말 알몸으로 몸을 겹치고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입술을 몇 번 빤 것뿐이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키스에 큰 무게를 두지 않는 도련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예달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그만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