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유예] 눈치와 사랑의 상관 관계

푸딩챤 2025. 9. 20. 08:49

마당을 청소하던 예달은 현관 바닥에 들어온 편지를 읽었다. 편지라고 하기에는 쪽지에 가벼웠지만 말이다. 예달은 천천히 글자를 읽어나갔다.

 

귀여운 당신의 얼굴이 좋소, 뺨의 홍조는 벚꽃을 닮았으며 당신의 미소가 만개하는 것을 내가 매우 좋아합니다. 당신과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소. 부디 내 맘을 알아주시오.

 

주시오, 마지막 문장까지 곱씹으며 읽던 예달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우리 도련님에게 이런 일이.... 홀로 중얼거리며 말이다. 근래에 도련님과 외출을 나갈 때면 이질적인 시선이나 누군가의 의도적인 움직임이 느껴지곤 했는데 그저 자신이 예민한 탓이라고 마음을 놓았던 과거의 본인을 떠올리고는 예달은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투박한 글씨체를 보아하니 남자 같은데, 우리 도련님을 감히... 하긴, 얼굴도 잘생겼지 성격도 좋으시지 다정하시지 나도 좋아하는데 남자라고 좋아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래도. 예달은 생각이 많아지기 전에 도련님을 찾아 나섰다. 꺼림칙한 쪽지를 소중히 손에 쥐고는 말이다.

 

“도련님, 계세요?”

똑똑, 울리는 노크 소리에 선우진은 읽던 책을 책상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문틈으로 보이는 꼼질거리는 손가락, 분홍빛 머리칼. 선우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들어와요, 예달 양.”

드르륵, 거리며 문이 열린다. 비장한 예달의 표정에 진은 책상에 턱을 괴고 다정히 예달을 바라봤다. 우리 예달 양이 또 무슨 사고를 쳤기에 이럴까.

“저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그것보다! 이거요. 제가 오늘 마당 청소하다가 본 건데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 누가 도련님을 연모하는 듯한데 어딘가 꺼림칙해요.”

 

선우진은 예달이 건네는 작은 쪽지를 열었다. 천천히 쪽지를 읽어가던 선우진을 걱정으로 그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예달의 시선에 선우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예달 양이 하는 건 다 안다네. 편지, 꺼림칙하긴 하네. .... 역겹기도 하고.”

“전 도련님이 너무 걱정돼요. 정말 조심하셔야 할 듯해요. 무슨 일이라도 당하시면....”

저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순진한 예달의 말투에 선우진은 허, 하며 웃음이 터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얇은 허리,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순수하고 여린 마음을 지닌 저의 메이드를 바라보며 진은 어딘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예달 양이랑 함께 다니는 게 좋을 듯한데. 어떤가? 적어도 홀로 다니다 엄한 일 당하는 것보다 둘이 다니면 누구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진의 물음에 예달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였다.

“좋아요! 제가 도련님 곁에서 도련님을 지켜드릴게요!”

다분히 의욕 넘치는 말과 함께 두 주먹을 굳게 쥐어 보이는 예달의 행동에 진은 옅게 웃었다. 믿음이 가는 작은 용기, 작은 마음. 당신은 참으로 따스한 사람이야. 진은 생각했다.

 

 

하루는 금방 흘러갔다. 예달의 마음은 조급했고, 진의 마음 또한 불편했다. 책을 읽는 도련님의 모습을 구경할 때는 순간 모든 걱정들이 쓸려가는 듯한 마음이 들었지만 말이다. 밤이 깊어가자 예달은 진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차분히 머리를 내리고 편한 옷차림으로 들어오는 선우진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이내 눈이 마주치자 예달은 목을 다듬으며 안 본 척했지만 그녀의 귀는 솔직했다. 분홍빛을 띠는 예솔의 귀를 바라보던 진은 침대 끝에 앉아 내려가려는 예달의 이름을 불렀다.

“예달 양.”

선우진의 목소리에 예달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몸을 움찔거리며 천천히 진을 바라봤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제발 도련님이 자신의 눈짓을 보질 못했기를 바라며 말이다.

“네?”

“다름이 아니고,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는 게 어떨까 싶어서.”

“네에?!?! 제, 제가요? 도련님 방에서요?”

예달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커졌다. 예달의 과민반응에 진이 옅게 웃었다. 금세 장난스러운 얼굴로 진은 예달에게 말했다.

“내가 아까 쪽지 때문에 걱정이 깊어져서 말이야. 혹시 다른 생각이라도 했나, 예달 양?”

예달의 얼굴이 점점 새빨개졌다. 어째 딸기보다 붉어지는 예달의 얼굴에 진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달은 반박할 수 없었다. 찰나였지만 불순한 생각을 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도련님을 몰래 바라본 전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장난이라네, 예달 양.”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예달이 진의 말을 듣자 맘이 놓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을 지키기 위해서야, 예달은 스스로 수천 번 곱씹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옆에 서있기만 해도 심장이 쿵쿵 뛰는 사람이 저의 곁에 심지어 한 침대에 같이 누워있으니 말이다. 이런 예달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도련님의 숨결에 예달은 마음이 복잡했다. 넓은 침대였지만 유난히 좁게 느껴졌을 정도니까. 탁상 위의 촛불이 꺼지자 방 안에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달빛이 잘 들어오는 다락에서 자던 예달은 엄습해오는 어둠에 불안한 듯 살짝 뒤척였다.

“달빛이 잘 들지 않지?”

진의 잠긴 목소리에 예달이 움찔거렸다.

“저 때문에 깨셨어요? 죄송해요. 제가 적응이 늦어서...”

“예달 양이 그런 건 다 알지. 자고 있지 않았어, 그러니 그런 걱정은 말고.”

진은 예달이 곁에 누워있다는 것 하나로 차가웠던, 시릴 정도로 가끔은 외롭던 잠자리가 따스히 물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기분은 퍽 나쁘지 않았다. 예달 또한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안정감을 느낀 것이 언제였는지 가물거릴 정도였으니 게다가 낮은 도련님의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는 어둠따위 두렵지 않을 정도로 따스했기에 예달은 몰려오는 졸음에 천천히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제가 어두운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래도 도련님이 곁에 계셔서 안심이 이제 안 무서워요. 도련님도 얼른 주무세요... 제가 지켜드릴 테니 걱정은 마시구요....”

늘어지는 말꼬리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 웅얼거리는 예달의 진심을 들은 선우진은 잠든 예달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기고는 흐트러진 이불을 덮어줬다. 지레 차가운 방이었는데, 이리 따스해질 수도 있구나. 이런 삶도 나쁘지 않겠지, 생각하며 말이다. 유난히 따스했던 밤이었다.

 

예달이 하루 종일 진의 걸음에 함께하던 날이 어느덧 2주가 지났다. 간만에 저녁 장이 근방에서 열려 둘이 다녀오던 길이었다. 물론 선우진은 태연히 예달에게 팔짱을 꼭 끼고 다녔기에 두 사람이 떨어질 일은 없었다. 밖에 나갈 때마다 이리 다니기로 약속했지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도 예달은 아직 적응이 잘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진이 저를 믿고 이리 팔짱까지 끼며 함께 다니려고 한다고 생각하니 적응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보다는 언제나 선우진의 안위를 우선시 여기는 마음을 지닌 예달이었으니까.

‘우리 도련님이 걱정이 많으신가 보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드려야지’

홀로 예달은 곱씹을 뿐이었다. 구태여 선우진도 그리 생각하리라 확신 없는 확신을 하며 말이다. 그런 예달의 생각은 예달의 표정에서 드러났다. 진은 그런 예달의 표정을 볼 때마다 웃음을 참느라 퍽 고생했다고 한다.

 

 평상시 귀갓길에 사람들이 많았기에 둘은 돌아가기로 했다. 한 손에는 장에서 산 온갖 간식거리를 들고 걸어가던 골목길은 유난히 으슥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더욱 음산했다. 순간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에 예달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숨이 가파졌고, 팔에 머물던 선우진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예달은 고개를 돌렸다. 덩치 큰 투박한 외모의 남자가, 진의 곧은 목덜미를 손에 쥐고는 큰 목소리로 쩌렁쩌렁 외쳤다.

“네가 감히....!! 내 거를, 내가 가져야 하는 것을 기껏 네 놈이...!!!!!”

예달은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순간 드는 공포감. 어쩌면 분노. 그런 예달을 바라보던 진은 천천히 말했다. 진정하라는 눈빛을 지닌 채로.

“... 예, 예달 양.”

진의 목소리에 예달은 정신을 차린 듯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낡은 빗자루가 눈에 보이자 예달은 무심결에 빗자루를 손에 들어 횡설수설 화만 내던 그 괴한의 손목을 내리쳤다. 먼지가 일자 괴한은 고통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진에게서 멀어졌다. 순간 느슨해진 힘에서 벗어난 선우진은 파들거리며 떠는 예달의 몸을 한 팔로 감싸 안고는 품에 두던 총을 장전했다. 왼손으로는 예달을 안고, 오른손으로 총을 조준하던 진은 떨리는 예달의 어깨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대로 있어요. 예달 양이 보기엔 썩 좋은 광경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탕-, 폭발음에 예달은 몸을 움츠렸다. 괴한의 괴성과 총성에 경찰이 몰려든 건 한순간이었다. 예달을 여전히 품에 안은 채 놓아주지 않던 선우진은 몰려든 경찰에게 말했다.

“감히 화족을 해치려고 했던 죄인이오. 게다가 오랫동안 사이온지 가를 맴돌며 스토킹을 일삼았던 죄인이기도 하지. 선처 없이 중한 벌로 처리해 주시오.”

“네가 그러고도 오래 살 수 있나 보자 사이온지!!!!!!! 그리고 너!!!!! 다른 남자한테 꼬리나 치는 너는 더 이상 내 순정이 아니야.....!!!!!!!!”

움츠러들던 예달은 문득 진의 품에서 고개를 돌려 괴한을 마주 봤다.

“남자한테 꼬리친 적 없는데요! 우리 도련님께 망언은 그만 두시죠?”

파들파들 떠는 몸으로 어찌 이런 당찬 행동을 하는지, 예달을 내려다보던 진은 살포시 웃었다. 분홍빛의 꽃잎 같은 나의 메이드가 이리 저를 향하는 용기가 너무 소중해서 진은 말없이 큰 손으로 예달의 귀를 살포시 막았다. 진의 따스한 온기에 예달은 문득 고개를 들어 진을 바라봤다.

“저런 말 들을 필요 없다네, 예달 양. 괜히 우리 예달 양 귀만 더러워질 뿐이지.”

 

끝까지 발악하던 괴한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적한 거리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문득 자신이 선우진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예달은 얼굴이 불타는 듯했다. 와중에 도련님은 나까지 걱정해 줬구나, 홀로 감동하며 말이다.

“예달 양, 고마워요. 덕분에 이리 다치지도 않고 일을 해결할 수 있었어. 이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가 모르는 예달 양의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아 어딘가 기쁘네.”

진의 다정한 말투에 예달은 민망한 듯 저의 머리칼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도련님이 제 이름을 불러주셔서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도련님도 정말 용감하신걸요! 만일 제가 방금 상황을 겪었다면 무엇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과찬이라네, 예달 양.”

선우진이 옅게 웃자 예달도 그를 따라 웃었다.

 

예달은 아마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선우진은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스토킹은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벚꽃을 닮은 홍조? 이것만 봐도 저를 향한 편지는 아닐 거라 선우진은 확신했었으니까. 투박한 글씨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홍조를 보일 사람은 아니기도 하고.

벚꽃, 선우진은 바로 예달을 떠올렸지만 여린 마음을 지닌 예달에게 알리자니 예달이 무척이나 불안해할 것 같았으니 그저 홀로 감추고 있었다. 게다가 뜨거운 밤, 이라는 상대의 단어 선택에 무척이나 불쾌하고 화가 났다는 것도 말이다. 나의 예달 양을 감히, 싶은 생각에 외려 붙어 다닌다는 선택을 한 것도, 그러면서 저의 소유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는 작은 선우진의 욕심을 예달은 절대 모르리라. 

진은 말없이 밤바람에 흐트러진 예달의 분홍 머리칼을 정리하며 맑은 예달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한없는 다정을 품은 눈동자가 무척이나 소중해서, 진은 사람 좋게 웃었다.

“예달 양은 눈이 참 예쁜 것 같네. 마음도 그렇고.”

예달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살며시 돌렸다. 소중한 마음이 무뎌지지 않도록 지켜줘야겠네, 진은 생각했다. 유독 따스했던 밤이었다. 으슥한 골목은 두 사람의 온기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