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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딸기는 포근해

푸딩챤 2025. 9. 20. 08:37

 

 

4월. 벚꽃이 만개하는 계절. 생명이 개화하고 사랑 또한 개화하는 계절. 모두가 낭만을 즐기고 있는 가운데 선우진은 마루에 앉아 굉장히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낮의 정오, 원래였으면 도박판에 있었을 그가 현재 저택에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더 이상 선우진의 흥미를 자극하는 아찔하고 아슬한 도박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로 선우진은 현재 마땅히 할 것이 없었다. 벚꽃은 휘날리고 햇살은 따스하고. 선우진은 따분했다. 물론 이 따분은 한 시진을 가지 못해 끝나고 말지만 말이다.

 

우당탕탕- 어디선가 무너지는 소리와 짧은 여자의 괴성. 다른 이라면 심장이 고동치며 놀랐을 것이 분명하지만 선우진은 익숙하다는 듯 옅게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소리의 출처로 향하는 발걸음이 선우진의 따분함을 조금씩 깨는 듯했다. 발길이 닿은 곳은 침실 옆 수납장. 겨울 이불들과 이별하는 계절이기에 예달이 바빴음을 선우진은 알고 있었다. 열심히 하얀 이불을 빨고 낑낑거리며 빨랫줄에 널어두고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예달을 바라보는 것도 근래 선우진이 지루함을 달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예달 양이 오늘은 또 어떤 사고를 쳤을까. 생각이 들 때쯤 보이는 하얀, 그러니까 뽀송한 먼지를 풍기며 바닥에 잔뜩 뭉쳐져 있는 하얀 겨울 이불들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꾸물거리며 열심히 구멍을 찾는 무언가. 그리고 그 무언가는 예상을 비껴가지 않았다. 선우진은 문에 살짝 기댄 뒤 팔짱을 끼고는 열심히 출구를 찾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폭신한 이불들 사이로 살며시 보이는 분홍빛. 정전기 때문인지 한껏 엉망이 된 분홍 머리칼. 선우진이 기다리던 분홍빛의- 그의 메이드가. 예달이 크게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선우진의 눈빛을 신경 쓸 겨를 따위 없는 듯 정신없이 겨울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터진 곳이 없는지 확인하는 그녀의 모습이 퍽 눈 속에서 해매는 분홍 토끼처럼 보여서 선우진은 순간 피식하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옅은 웃음소리가 울리자 예달은 천천히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웃음을 참으려 손으로 입을 가린 도련님이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수치심에 예달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어갔다. 헝클러진 머리를 급하게 정리하며 예달은 이불 사이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달의 예상과 달리 막 말린 겨울 이불은 굉장히 무거웠고, 가녀린 예달의 발목을 잡기에는 충분했다. 순간 휘청하며 뒤로 넘어가는 저의 몸에 느껴질 충격을 알고 있다는 듯 예달은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몇 분이 지났음에도 느껴지지 않는 통증. 그리고 어딘가 단단한....

 

단단한? 예달은 꾹 감은 눈을 떴다. 여전히 몸은 뒤로 기울었는데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눈에 보인 건 저의 허리를 잡고 사람 좋게 웃고 있던 선우진이었다.

 

 

 

“예달 양은 하루라도 조용하게 보내는 법이 없군.”

 

예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우진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예달은 그저 저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주는 선우진의 손길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얼굴이 터질 듯이 뜨거웠다. 4월인지 8월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도련님이 거기 계신지 몰랐어요... 죄송해요. 겨울 이불을 위에 올린다는 게 그만....”

 

예달의 이실직고에 선우진은 흐트러진 예달의 붉은 머리핀을 천천히 제자리에 꽂아주었다. 겨울 이불이 무척이나 무거운데 그걸 홀로 올린다고 얼마나 끙끙거렸을지 말하지 않아도 눈에 선한 모습에 선우진은 연신 웃었다. 그저 저에게 부탁을 했으면 되는 것을, 진은 생각했다.

 

벚꽃잎이 바람을 타고 침실 창문을 넘실거려 들어왔다. 예달의 머리칼에 살며시 꽃잎이 내려앉자 선우진은 예달이 벚꽃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하늘거리고,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겠고, 그래서 가끔은 예측하기 어려운. 분홍빛을 띠는 나의- 선우진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제 선우진에게 겨울 이불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미칠 듯이 저를 간지럽히는 지루함과 따분함을 깨트릴 수 있는 것이 눈앞에 있는데 무엇이 중요할까.

 

 

“예달 양, 오늘 날이 좋아서 밖에 산보 겸 나가자 하는데. 동행하겠나?”

 

진의 충동적인 계획이 어절을 타고 흘러나온다. 선우진은 이리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예달은 손등으로 홧홧한 뺨을 달래며 의문스러운 눈으로 저의 도련님을 바라봤다. 문득 든 생각, 이거 설마 데이트인가? 데이트야? 지금... 지금, 도련님이 데이트하자고 하는 거지? 심장이 콩콩거리며 뛴다.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달의 심장은 통 진정하려 하지 않았다.

 

 

“안되겠나? 나는 예달 양이 꼭 동행했으면 좋겠는데. 봄이 오고 꽃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잖나.”

 

“.... 도련님은 벚꽃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다정한 저의 도련님의 말들에 예달은 어딘가 돋는 심술이 말들로 터져 나오고 말았다. 저의 맘도 모르고 매번 이렇게 다정한 말들로 마음을 들뜨게 만드니 말이다. 물론 자신의 짝사랑이 이뤄질 거라 기대조차 하지 않는 예달이었지만 그녀도 사람이었기에 가끔은 이리 심술이 돋아나기 마련이지 않을까. 물론 예달은 전혀 눈치채고 있지 못했다. 저의 머리 위에 벚꽃잎이 내려앉은 것도, 선우진이 그녀가 벚꽃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녀의 심술에 선우진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웃거렸다. 장난기로 가득한 얼굴이었는지, 아니면 진지한 얼굴이었는지, 봄날의 햇살이 눈이 부셔 예달은 선우진의 얼굴이 잘 보지 못했다.

 

“전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근래에 흥미가 생겨서. 워낙 벚꽃이 만개하는 봄이라 그런가. 자꾸 눈에 밟혀서 더 그런 듯하고. 그래서, 나랑 같이 동행하겠는가? 하루는 꽤 짧다네, 예달 양.”

 

예달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달의 대답과 함께 선우진은 예달의 얇은 허리를 가볍게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예달의 발목을 휘감던 무거운 이불이 스르륵 그녀의 발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달이 어버버거리는 틈에 선우진은 그녀의 팔목을 살며시 잡고 밖으로 향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인적이 드문 다방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의 외국인이 운영하는 듯한. 고급스러운 글씨체로 ‘cafe’ 라고 적힌 곳으로 향하는 진에 예달은 도련님이 이런 곳도 아셨나 생각이 들었지만 무거운 고동색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통창과 햇살과 함께 보이는 옅은 분홍빛의 벚꽃들. 말그대로 만개한 아름다운 벚꽃들이 마치 한낮의 불꽃놀이처럼 보였기에 예달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은은하게 코끝에 맴도는 커피향과 그리웠던 버터 향이 예달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익숙한 듯 선우진은 예달을 창가 자리에 앉혀두고는 커피를 주문하러 간 듯했다. 예달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얼마만에 보는 벚꽃인지. 애초에 이곳에 오고나서는 꽃을 제대로 바라볼 시간과 여유 따위 없었는데.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예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진이 백합이 그려진 유럽풍의 고급스러운 잔에 담긴 따스한 커피 두 잔과 뽀얀 크림에 올라간 붉은 딸기가 눈에 띄는 케이크를 테이블에 내려다 놓는 소리에 예달은 창가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탁자로 옮겼다. 얼마 만에 보는 케이크인지. 원래도 달달한 것을 좋아하던 예달에게 선우진의 이런 선물은 살면서 받았던 그 어떤 선물보다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예달이 한껏 웃으며 진을 바라봤다. 무척 아이를 닮은 그녀의 순수한 웃음에 진은 입꼬리를 짙게 올려 웃었다.

 

 

“여기 자주 오세요?”

 

예달이 포크를 손에 쥐고는 반대편에 앉은 진을 향해 물었다. 선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음에 안정이 필요할 때마다 찾는 곳이었다. 사람도 적고, 커피향이 좋고, 유난이 햇살이 좋은 이 카페는 진의 안식처였다. 예달은 설레는 얼굴로 케이크만 바라보고 있었다. 선우진이 커피를 홀짝이며 살며시 케이크 그릇을 예달을 향해 스윽 밀자 예달은 매우 집중한 얼굴로 살며시 케이크를 포크로 떠내 입에 와앙, 물었다.

 

입에 크림의 단내가 맴돈다. 예달의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열심히 오물거리며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다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옅게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선홍빛 머리칼. 예달은 입가에 도는 딸기의 상큼함과 우유의 부드러운 단맛을 놓치기 싫어서 케이크가 무너질 때까지 꼭꼭 씹었다. 오랜만에 즐기는 여유와 단맛. 그리고 저를 향하는 진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은 한낮의 카페가 여기서 더 포근할 수 있을까. 예달은 이 포근함에 저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제대로 가사를 알지도, 제대로 제목도 모르는. 21세기 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었던 노래들이 그녀의 잔잔한 목소리로 흘러나오자 편안히 몸을 의자에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진의 발끝이 살짝 흔들거렸다. 무릎에 올린 손가락으로 저의 무릎을 살짝 톡톡거리며 말이다.

 

 

진은 저의 포크로 케이크 위에 올라가있던 딸기를 찍어 예달에게 살며시 건넸다.

 

“딸기를 좋아하는 듯해서. 그리고 예달 양의 이런 면을 나 말고 누가 보는게 싫어서, 이해해주게.”

 

예달은 순간 의아했지만 진의 행동으로 삽시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예달이 진의 포크를 받아드는 순간 진은 가까이 다가가 예달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돌아가서는 엄지에 묻은 뽀얀 크림을 저의 입에 넣는 도련님의 행동은 잔잔하게 울리던 예달의 심장을 달구기 충분했다.

 

“예달 양, 선물은 맘에 드는가?”

 

장난스레 아무렇지 않은 듯 커피를 마시던 진의 물음에 예달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너무하셔. 정말로 너무하셔... 홀로 중얼거리며 말이다. 대답이 이어지지 않자 진은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물었다.

 

 

“맘에 들지 않는가 보군.”

 

진의 말에 예달은 급히 고개를 올려서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 와서 받은 최고의 선물인데. 오히려 이 마음을, 감사함을 어찌 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기쁜데. 예달은 벚꽃이 물들고 간듯 옅은 홍빛의 뺨을 숨기지 못한 채 손에 들린 딸기를 한입 베어 물고는 진을 바라보고 말했다.

 

“너무 맘에 들어요. 제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에요. 벚꽃은 만개하고, 커피는 향이 좋고. 케이크는 달달하고, 딸기는 폭신하니까요.... 게다가 도련님이 주신 선물인데 제가 어찌 싫어하겠어요.”

 

예달의 솔직한 말들에 진은 푸핫- 웃음이 터졌다. 진의 웃음에 예달은 입술을 삐쭉거렸지만 이내 진을 따라 예달도 살며시 소리 내어 웃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살며시 웃었다. 진은 정적이 따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예달의 흥얼거리는 소리와 은은한 커피향. 창밖으로 두사람을 반기는 벚꽃들. 그리고 진은 이러한 여유가 퍽 괜찮다고 생각했다. 항상 아슬한 줄타기 같은 일상을 즐기던 그에겐 이것이 하나의 일탈일 테니. 게다가 지금 그의 앞에 만개한 벚꽃들 사이 가장 찬란한 벚꽃이 진의 시야에서 빛나고 있으니 무엇이 더 필요할까.

 

 

 

‘멈추지 않아 멈출 수 없어 이 충동을 멈춰줄 사랑이 있을까?

 

눈부시고 상냥한 평범한 일상, 행복이 넘쳐흘러. 너만의 빛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