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의마작 脱衣麻雀. 게임의 한 장르.
기본은 마작 게임이나, 탈의(脫衣), 즉 옷을 벗기는 마작 게임. 일종의 야구권 법칙을 이용한다. 상대가 승리하는 경우, 패자는 옷을 한 꺼풀씩 벗는 것.
예달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며 시야가 천천히 좁아진다.
예달은 곱씹었다. 지금 오로지 슬립 원피스 하나만 몸에 걸친 저의 다리가 살짝 냉기가 돌자 정신이 들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달은 당장이라도 현재 상황을 이해해야 했다. 아니, 이해해야만 했다. 그도 당연했다. 자신의 옷차림도 옷차림이지만 지금 고용주 ······. 그러니까 선우진이 곁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늘 입던 스리피스 정장은 어디로 간지 알아챌 틈도 없이 그저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말이다. 예달은 곱씹었다. 어쩌다 이 상황까지 오게되었는가.
이곳에 떨어진 지도 어연 몇 달이 지났다. 정말 영화에서만 볼 법한 사유로 얼떨결에 1930년대로 떨어진 예달은 일본 화족인 사이온지 가의 저택에서 일하기로 했다. 이건 그저 이 방법이 아니라면 도저히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고 판단했던 예달이 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생존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순탄하진 않았다. 어째 입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미숙한 일본어. 익숙지 않은 집안의 잡일들. 알아들을 순 없지만 대충 가볍지 않은 말들이 오가는 것은 알 수 있는 대화들. 의심스러운 눈초리. 예달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진짜 이러다가 짤리면 어쩌지, 싶은 고민은 예달에겐 일상이었다.
그런 예달을 눈감아준 건 그 도련님이었다. 물론 미래를 안다니, 예지력이 있다니 퇴직금이라 적힌 두툼한 봉투를 쥐여주던 선우진의 모든 어두를 걷어간 예달의 변명도 이유라면 이유가 되겠지만 이는 단순히 선우진의 호기심이 일으킨 결과였다. 그렇게 얼떨결에 퇴직유예를 받은 예달의 시선은 언제나 도련님을 향했다. 다정함이 죄라면 최고 형벌을 받을 그 도련님, 선우진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래, 다른 것이 아니고 같을 수가 없었다. 그야 당연하다. 예달의 시선을 매번 앗아가는 그 사이온지 도련님은 사이온지 가 사람이 아니니까. 물론 예달은 이걸 알 턱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에 담아야 할 도련님이 바로 곁에 있는데 그럴 정신이 어디있겠는가. 살던 21세기에도 이리 다정하고 잘생긴 ······. 아니, 좋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예달은 지금 지독한 짝사랑을 앓고 있었다.
예달은 원래 도박에는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도박의 도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선우진은 달랐다. 저택에 도련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도련님의 발걸음이 도박장으로 향한 것이라 모두가 줄곧 그리 알고 있었고 예달 또한 그랬다. 그날도 어김없이 선우진의 기척은 저택을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종종 큰 저택을 다 돌아다녀도 도련님의 머리칼 하나 발견하지 못한 예달은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급한 마음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걸어서 얼마 멀지 않은, 예달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동네 도박장이었다.
거기서부터 잘못되었다. 예달은 그곳에 가면 안 됐다.
그곳에는 토끼같이 생긴 분홍머리 메이드 아가씨를 가만히 둘 잰틀맨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예달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올라가는 하얀 원피스의 밑단을 잡아당겼다. 묵직한 작패들이 살짝 뻑뻑한 녹빛 벨벳 작탁위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마작은커녕 포커도 할 줄 모르는 예달이 어찌 마작판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겠는가. 거의 울음이 눈가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선우진이 예달의 곁에 앉은 것이었다.
“다 큰 사내가 여자를 상대로 이러는 건 좀 비겁하지 않나? 상대할 거면 내가 나을 듯한데.”
살짝 미간을 찌푸린 진이 능청맞은 목소리로 상대를 바라봤다. 살짝 올라갔다 내려가는 왼쪽 눈썹. 짙은 눈동자를 마주친 상대는 순간 드는 압도감에 고개를 저었다.
“참고로 내 옷은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싸다네.”
진의 한쪽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아무런 후회 없는 목소리. 예달은 이런 진의 목소리를 사랑했다. 어딘가 느껴지는 든든함과 어절 하나하나에서 새어 나오는 자신감.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제나 옅은 웃음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다정한 도련님. 이번에는 무슨 왕자님처럼 자신을 위해 원치 않았을 판에 앉은 진을 예달은 넋을 놓고 바라봤다. 순간 드는 안도감에, 그저 진이 곁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고였던 눈물이 투명한 피부 위로 두어 방을 떨어졌다. 그런 예달을 바라보던 진은 부서질까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예달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손을 타고 예달의 냉기가 전해지자 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대우를 받을 필요도 없었던 예달이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을 겪고 있었으니 진은 심장 언저리에서 올라오는 미안함과 상대에 대한 아주 작은 일말의 분노에 어금니를 깨물었다. 예달의 울망거리는 눈과 마주치자 진은 입고 있던 검은 코트를 천천히 예달의 어깨에 둘렀다. 코트를 예달이 입은 건지 예달이 코트에 입혀진 건지... 그저 맑고 큰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예달의 모습에 진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묵직한 작패들이 진의 앞에 길게 놓인다. 익숙하다는 듯 꼿꼿이 허리를 펴고 패를 살피던 진은 눈웃음을 지었다. 곱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대는 알 턱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작패가 몇 번을 돌았는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복잡한 어휘들이 점차 조용해져가던 정적을 살짝씩 깨운다. 예달은 살짝 마음이 조급했다. 언제나 깔끔한 핏의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다니던. 아주 완벽할 만큼 아름다운 핏을 자랑하던 그 정장들이 어느새 셔츠와 바지만 남았기 때문이다. 예달은 저의 어깨에 올라가있는 진의 코트 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산뜻한 우디향이 예달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마치 긴장하지 말라는 듯, 진이 곁에서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예달은 순간 진을 바라봤다. 이런 단조로운 차림의 도련님은 처음이라, 예달은 눈을 뗄 수 없었다. 곧은 콧날과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 깔끔하게 떨어지는 두꺼운 목선, 하얀 셔츠위로 살며시 도드라지는 근육들, 깔끔하게 떨어지는 탄탄한 허벅지,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 핏줄이 드러난 두꺼운 손목, 그 손목 위에 올라간 은은한 금빛을 띠는 시계······. 예달은 그런 진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감았다. 자신의 볼이 옅은 홍빛을 띠는 것도 모른 채.
“어쩌지, 도련님? 이제 가장 남사스러운 부분만 남았는데. 어딜 벗을래? 메이드 앞에서 안 쪽팔리려면 어디가 좋을까~. 아, 이미 서로 다 본 사이인가?”
순간 예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런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는구나. 자신의 불쾌함보다 행여 도련님의 심기가 불편해졌을까, 예달은 고개를 푹 숙이다 급히 진의 눈치를 살폈다. 진은 처음 그 옅은 웃음을 그대로 지닌 채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외려 호탕하게 웃으며 예달을 바라봤다. 언제나 포근한 저 눈. 다정히 저의 모습을 담는 흑갈색의 짙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을 볼 때면 예달은 줄곧 우주를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글쎄, 내 예달 양에게 골라보라고 할까.”
진이 예달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능청맞은 웃음을 하고서는 윙크까지. 앙큼하기 짝이 없었다. 예달은 얼굴에 열감이 돌았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살짝 헝클러진 머리에 흐트러진 셔츠를 하고 그런 미소를 담는다니. 도련님 절 죽이시고 싶으신 건가요 ······. 예달은 생각했다.
“.......바지요.”
목 메이는 목소리로 예달은 말했다. 말했다기보단 속삭였다에 가깝지만 말이다.
셔츠와 바지, 어떤 선택도 살빛을 피할 수 없었기에 예달은 바지를 골랐다. 바지 안에 넣어진 긴 셔츠의 밑단이 큰 도움이 되리라, 예달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귓가까지 울리는 심장 박동에 정신이 아득했지만 말이다.
예달의 대답을 들은 진은 호탕하게 웃었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진은 예달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살며시 정리했다. 진의 손길이 귓가에 닿자 예달은 살짝 움찔했지만, 그저 따스한 열기가 전해지는 진의 열기를 가만히 받아들였다. 예달의 분홍머리를 귓가에 살며시 넘겨준 진은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나는 시계를 벗겠네.”
예달은 순간 숨이 막혔다. 그렇다면 본인에게 굳이 물어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순간 바보처럼 느껴지는 자신에 예달은 원피스를 살짝 쥐었다. 말할 틈도 없이 진은 시계를 풀었다. 시계가 부드럽게 진의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의 시계를 쥔 상대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금시계 위로 반사되는 조명 빛에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자신의 디폴트 표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반면에 진의 표정은 동요하나 보이지 않았다. 외려 차분하게 가라앉는 속눈썹과 흐트러진 소매 셔츠를 정리하는 듯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굴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작탁위로 흐르는 정적. 탁, 탁, 툭. 묵직한 작패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예달은 정신없이 탁자 위로 드러나는 패들을 바라봤다. 꿀꺽거리며 넘어가는 침 소리, 탁탁거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치는 소리. 상대 손에서 잘그락거리며 울리는 진의 시계 소리. 그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 예달은 순간 도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치 묵직하게 저를 눌러오는 압박감에 바라본 진은 여전히 능청맞게 패를 돌리고 있었다. 천천히 마치 판을 뜯어보는 듯한 진의 눈길에 예달은 순간 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마치 모든 패를 읽고 있는듯 했기에. 녹빛의 작탁은 더 이상 녹빛이 아니었다. 모두 진의 눈 안에 담긴 듯 흑갈색을 띠었다. 판을 바라보는 진의 시선은 날카로웠고 깊었다.
“멘젠(門前)이라네.”
진은 살며시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상대는 그런 진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은 마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텐파이.(聽牌)”
진의 목소리가 작판 위의 정적을 몇 번이나 깨운다. 상대는 진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한숨을 쉬며 리치를 선언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번. 상대의 의기양양한 표정은 이제 거의 울기 직전의 아이처럼 일그러졌다. 예달은 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이 모든 판이 계획된냥 판을 돌리는 진의 모습은 가히 대범했으므로. 와중에도 돌려 받는 모든 옷을 예달에게 덮어주는 진의 모습은 예달의 가벼운 시선을 앗아가기 충분했으니 말이다.
상대의 목소리가 거의 울먹일 때까지 시간이 흘렀다.
“이걸로 봐주시오. 내가 상대를 잘못 봤소. 제발......”
반 나체가 되어 퍽 우스운 꼴이 된 상대가 두툼한 봉투를 작탁위로 올려둔다. 진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봉투를 밀어낸 뒤 경쾌한 소리를 내는 구두를 배경음 삼아 상대 옷을 모두 손에 쥐더니 뒤 벽난로로 걸어갔다.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 빛이 꺼지더니 다시 붉게 타오른다. 퀘퀘한 냄새가 예달의 코를 찔렀다. 예달이 눈을 다시 떴을 때에는 이미 상대의 옷은 하나의 재가 되고 있었다. 벽난로 앞에서 나체의 꼴로 좌절하는 상대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예달은 진의 이끌림에 따라 밖으로 나왔다.
다시 입은 이 메이드복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여전히 진의 코트를 두르고 있던 예달은 어느새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을 마주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푹, 하고 숙여 앉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둥근 원을 그리며 넓게 퍼졌다. 그런 예달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진은 천천히 몸을 숙여 예달의 한 손으로 뺨을 감싸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자신의 앞에서 훌쩍거리면서 울음을 참는 예달의 모습에 진은 푸스스 웃었다.
“예달 양, 내가 미안해요. 이제 그만 울고, 나 좀 봐봐요. 응?”
예달은 울망이는 눈을 슬며시 뜨고 진을 바라봤다. 노을 지는 햇살에 미치는 진의 짙은 흑갈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예달은 히끅, 순간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붉어진 눈 밑과 저를 바라보는 눈빛, 오로지 믿음으로 가득 찬 그리고 저를 향한 ·····, 사랑을 살며시 바라본 진은 순간 간질거리는 심장에 예달의 뺨을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다 예달의 딸꾹질에 사람 좋게 웃었다. 진은 그런 예달을 천천히 일으켜 걸음 맞춰 걸었다. 예달은 순간 멈춰 앞서나간 진의 셔츠 소매를 살짝 쥐었다.
“도련님... 이제 도박은 자제하세요. 너무 위험해요...”
“하하, 알겠어.”
물론 거짓말이다.
“예달 양은 내 걱정이 너무 많아.”
진은 천천히 웃었다. 또 그런 다정한 웃음. 예달은 무뎌지는 불안에 순간 배시시 웃었다. 정말 이대로 도련님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괜찮을 것만 같아서. 끝없는 다정이라면 어떤 사랑도 감당할 자신이 있어서. 햇살은 점점 붉은 빛을 띠었다. 햇살을 머금어 다채롭게 붉어진 예달의 분홍 머리칼과 저를 향한 고운 웃음. 진은 유독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도박보다 지금 저 앞에 놓인 장면이, 구태여 늘 보던 도박판과 달리 예측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울렁거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가히 정의할 수 없지만 그것이 퍽 불쾌하지 않았기에 그것에 유예를 주기로 하였다. 그 유예가 언제까지 길게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웃고 싶었기에.
그날은 하염없이 붉었던 1930년의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