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명 효과와 스피커를 통해서 천사인 척 연기하는 주인공
나는 작업을 반쯤 마친 하우스 안에서 작게 속삭여 본다.
“월터······ 롤리······,”
그러자 사방에 깔린 스피커에서 몇 배로 키워진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월터어······ 롤리이······.”
실내에서 퍼져나가는 음성은 미칠 듯한 볼륨과 사방에서 뿜어져 나온다는 압도감, 그리고 밀폐된 공간에서 나오는 특유의 울림으로 장중한 분위기를 낸다.
그래······. 마을 행사 때 강매당한 노래방 기계와 스피커가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이곳에서 나는 천사의 ‘위엄’을 드러낼 것이다.
물론 스피커로 목소리 좀 울리게 틀어 놓는다고 상대가 겁먹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스피커는 단지 양념 정도일 뿐이니, 결국 핵심은 ‘예언’의 권능에 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흔들리는 16세기 사람에게 나는 미래를 속삭일 테니. 적어도 예언자쯤으로 보이기는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계획이 잘 먹힌다면······ 권능과 위엄 앞에 월터 롤리는 무릎 꿇을 것이고, 나는 그의 앞에 강림할 것이다.
신세계의 천사로서.
(롤리 시점)
한 남자가 바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남자였다.
키도 그보다 컸고, 현란한 문신이나 색색의 장신구 따위도 없었다. 헐벗지도, 껴입지도 않았으며, 그냥 흰색 옷을 두르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월터 롤리를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위를 꺼내 포도의 가지를 잘랐다.
그러자 신선한 포도가 나무로부터 떨어져나와 발치의 상자에 담긴다.
그의 목소리가 왼쪽에서 들리고 다시 오른쪽에서 들린다. 앞쪽에서 들렸다가 뒤쪽에서도 들린다.
‘황제’의 음성이 강렬하게 그의 온몸을 때리고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이미 주님의 빛 속에서 산다.”
이 남자는······.
이분은······.
인간의 모든 언어로써 말씀하신다.
롤리 경은 떨리는 손발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한한 경외감 속에서 묻는다.
“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황제’는, 아니 인간인지도 잘 모르겠는 저 압도적인 존재는 말했다.
“나는, 네모(NEMO).”
“Nemo sum.”
“Je ne suis personne.”
“No soy nadie.”
“Não sou ninguém.”
······
······
······
나는 아무도 아닐지라.
월터 롤리는 성경을 떨어뜨린 채, 나머지 한쪽 무릎도 꿇었다.
‘아무도 아닌 이’를 향하여.
2. 부활한 주인공
숨을 들이쉰다. 그러자 깨끗한 폐 속에 탄 내음과 피비린내가 섞여 들어온다.
손을 쥐었다 펴본다. 그러자 깨끗하고 보송하게 빚어진 내 피부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귓가에는 무언가 여전히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와 바람 소리, 사람들의 숨소리가 느껴진다.
눈앞에는 수많은 이들이 무릎 꿇고서 몸을 떨고 있다.
나는 그 모든 감각을 느끼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
내가 되살아났구나.
또, 내가 되살아났고, 그 광경을 목도한 이들이 나를 향해 경배를······
······
······
······
‘뭐야. 뭔가 허전한······.’
그 허전함의 정체를 알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흐, 흐어어억, 사람이 죽음 가운데서 살아났다...! 죽음 가운데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리고 난 필사적으로 밑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얼굴이 뜨겁게,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지만 일단 주위에 불씨가 남아 있어 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옷 어딨어.
일단 주위의 사람들부터 치워야...
"아버지...!"
"오, 주여!"
안 되겠다.
도저히 뭔가 할 수 있는 때가 아니다.
나는 아주, 천천히,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게 주위를 빠르게 스캔했다.
그러나 몸을 가릴 천쪼가리는커녕 사람들의 시선을 막을 장애물 하나 없었다.
얼굴이 슬슬 빨개지다 못해 터질 것 같았지만, 수십 년 동안 얼굴에 붙어 자리잡은 '천사용 미소'가 다행이도 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주고 있었다.
그래... 좋아.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해야겠지.
"싸움은 끝났습니까?"
아니, 기도만 하지 말고 내 말을 좀 들으라고, 말을.
여전히 말이 없는 사람들을 보고서 나는 슬슬 혼절할 것 같은 수치심과 긴장감과 당혹감과 그 외 기타 등등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느끼며 서둘러 잿더미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에도 내가 20여 년 동안 갈고 닦은 ‘천사군림보(가칭)’를 통해 사뿐사뿐 품위 있게 걸어 내려갔다.
“이름 없는 이 만세!”
뭐야.
“이름 없는 이여!”
갑자기 사람들이, 아군들이 내게 달려들어 내 몸을 붙잡고 들어올린다. 당황한 티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흥분한 이들의 얼굴을 보니 이제 뭔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기세다.
“이분의 소생한 육신을 적들 모두에게 보여줍시다! 아직 무기를 버리지 않은 이들에게 기적이 뭔지 보여줍시다!”
“우와아아아!”
너 이 새끼, 누구야. 누가 저딴 말을 외쳤······
“우와아아아아!”
싫어.
“네모! 네모! 네모! 네모!”
싫다니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수천 명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 하, 하지, 하지 마······!
끄으으아아악······!